빨간 불꽃 위 음식이 지금의 인간을 만들었다
입력 2011-10-21 17:21
요리 본능/리처드 랭엄/사이언스북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됐나. 무엇이 인간을 동물과 다른 인간이란 종(種)으로 만들었나. 저자인 동물학자 리처드 랭엄이 흥미롭게 표현했듯, 인간은 어떻게 ‘부실한 육체에 빛나는 정신력’을 갖게 됐는가. 인류 지성이 내놓은 답들의 더미위에 저자는 또 하나의 가설을 얹었다. ‘요리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60년대 이미 ‘날 것과 익힌 것’에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로 화식(火食)을 꼽았으니 익혀 먹는 음식이 인간적 특징이라는 주장 자체는 새롭지 않다. 파격은 저자가 인류학이 아니라 생물학에 발 딛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랭엄이 보기에 화식은 인류 문명의 토대가 아니라 인간이란 생물의 토대였다. ‘거대한 뇌와 작은 소화기관’으로 요약되는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를 결정한 건 화식이었다.
랭엄식 화식론의 구조는 이렇게 이어진다. 익혀 먹는 화식은 인류에게 생식(生食)이 주지 못한 ‘고열량의 에너지’라는 신천지를 열어줬다. 고효율 에너지는 다시 인간에게 거대한 두뇌를 허락했고, 사냥을 통해 남녀분업을 탄생시켰으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화식의 고효율은 과학이 증명해왔다. 2006년 영국의 한 실험 결과, 하루 필요열량 2000∼2300㎉로 짜여진 생식 식단을 제공받은 참가자들은 10일 만에 몸무게가 평균 4.4㎏이나 줄었다. 생식하는 여성 절반은 생리가 끊겼다. 원인은 낮은 소화율이었다. 익힌 녹말의 소화율은 95%나 되지만 생 녹말은 50% 정도에 불과하다. 달걀 단백질도 익혔을 때(91∼94%)와 익히지 않았을 때(51∼65%) 소화율 차이는 컸다. 익히지 않은 음식은 배부르게 많이 먹어봐야 쓸모가 없었다는 얘기다.
화식은 턱, 위, 소장, 대장 같은 소화기관의 크기도 줄였다. 소화가 잘되니 거대한 위를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날렵한 소화기관은 또 다른 혁신을 가져왔다. 소화기관 자체를 운영하기 위한 열량이 줄어든 것이다. 고효율의 연쇄반응이다. 예를 들어 에너지 100을 얻기 위해 유인원이 80을 쓴다면, 인간은 30만 쓰면 소화기관을 돌릴 수 있다. 절약한 에너지는 큰 두뇌를 유지하는 자원이 됐다. 인체 무게의 2.5%에 불과한 뇌는 전체 에너지의 20%를 쓴다. 만약 인류가 생식을 했다면 에너지 먹는 하마 같은 큰 뇌를 유지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화식 덕에 인간은 뜻밖의 여유시간도 얻었다. 탄자니아 곰비국립공원의 침팬지는 하루 활동시간(12시간)의 절반(6시간)을 음식을 씹는데 소비하는 반면, 인간의 식사시간은 하루 1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20세기 주부를 해방시킨 게 세탁기였다면, 먼 옛날 인류에게 여유를 만든 건 익힌 음식이었다.
해방된 일꾼들이 몰려간 곳은 사냥터였다. 사냥의 성공률은 낮다. 사냥만으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채집으로 생존을 위한 최소 에너지가 확보된다면, 사냥꾼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사냥에 매진할 수 있다. 집에 30분이면 소화시킬 수 있는 음식이 준비돼 있을 테니 말이다. 화식이 허락한 건 그런 자유였다. 원시부족은 채집하는 여성이 요리를 책임지고, 사냥하는 남성이 추가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성적(性的) 분업을 발전시켰다.
남녀 한 쌍으로 이뤄진 결혼 제도. 그 유구한 역사의 시작은 결국 화식이었다. 저자는 과감하게 말한다. “남자에게 결혼의 동기는 성관계 대상에 대한 필요보다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요리에 대한 필요인 듯 하다.” 원시시대부터 결혼은 경제 공동체였다는 주장이다. 조현욱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