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 3형제 ‘카라마조프 형제들’ 닮아”… ‘흑산(黑山)’ 펴낸 소설가 김훈

입력 2011-10-20 17:58


소설가 김훈(63)이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하던 말이 있다. ‘인생고해’. 그 말이 씨가 됐는지, 그는 지난 4월 바다로 둘러싸인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5개월 동안 칩거하며 신작 장편 ‘흑산(黑山)’(학고재)을 탈고했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바다는 선감도 앞바다가 아니라 전남 무안군 흑산도 앞바다다.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흑산도로 유배돼 ‘자산어보’ 등 탁월한 저술을 남기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정약전이 중심인물이다.

20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김훈은 “딱 15분만 모두(冒頭)발언을 하겠다”면서 이렇게 소설 배경을 말했다. “(천주교 순교 성지인) 절두산 절벽을 보면서 작품을 구상했지요. 자유, 사랑의 세계를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를 생각하게 됐고, 그들이 어떻게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됐는지 고민했습니다.”

소설은 천주교 박해가 소재지만 신앙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는 “소설 속의 천주교 신앙은 속세와 관련된 부분으로만 제한했다”며 “영혼과 관련된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으며 관찰자의 시각을 견지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가치중립적 세계에 인간의 구원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죽었지요. 단 한 권의 책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는 그 섬에서 혼자 죽어간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느낀 기막힌 슬픔이 소설 군데군데에 들어있지요.”

소설은 정약전의 유배 생활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천주교 순교자 황사영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다른 한 축은 양반 지식인, 배교자,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하류 계층의 삶이다.

“정약전, 약용, 약종 삼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닮았지요. ‘카라마조프 형제들’에는 모든 인간 유형이 등장하는데 정약전 형제들도 그렇지요. 다산 정약용은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후세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지만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을 밀고한 대표적인 배교자였지요. 그 형제들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에 대해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 끔찍해요. 그들이 침묵으로 묻어버렸던 고통이 이 소설에서 약간 나오지요.”

그는 “인간 현실에서는 어차피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에 정약전의 주인공 자리를 박탈했다”며 “앞으로도 소설에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뚜렷한 주인공이 없기 때문에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20여명이나 된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군이다.

그는 출판사의 주문에 응해 직접 펜으로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스스로 ‘가고가리’라고 명명한 생명체가 하나의 이상향인 ‘흑산’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다. “소설을 다 쓰고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를 그렸지요. 배교자와 순교자들이 하나의 몸체를 이뤄 수억 년 시공을 날아가는 한 마리 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가고가리’는 새, 배, 물고기, 말을 합성한 형상이며 미래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이지요.”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