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5) 내 생애 최고의 만남… 전라도 친구 ‘김오남’

입력 2011-10-20 20:48


어머니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외가에 맡겨진 채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친절하고 아주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소풍을 갈 때도 ‘도시락 싸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전쟁통이라 집안 사정이 빤했기 때문이다. 교토에서 도쿄 쪽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무작정 기다린 날도 많았다. 교토의 경승지 아라시야마에는 가쓰라카와라는 유명한 강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너는 나무상자를 타고 떠내려왔다. 너의 진짜 집은 저 강 상류에 있다”고도 했다. 실제로 나는 강가에 가서 “내가 태어난 집이 어디일까” 하고 찾아본 적도 있다.

나는 늘 혼자였기 때문에 동물을 매주 좋아했다. 집을 잃은 개나 고양이, 심지어 뱀이나 바퀴벌레까지 키울 정도였다. 동물은 배반하지 않았다. 애정을 주면 반드시 그 애정은 다시 돌아왔다. 내가 도쿄의 수의축산대학(일본대학 축산과 전신)에 진학했던 이유도 그만큼 동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김오남’이라는 한국 친구를 만났다. 그는 전남 출신으로 유학을 왔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나와 같이 살았다. 그는 전형적인 전라도 사람이었다. 수수하고 정이 많았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다. 당시 도쿄엔 메이지대학과 같은 이름의 메이지학원대학이 있었다. 유명한 미션스쿨이었다.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는데 김씨와 나는 거기서 두 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큰 벽을 페인트칠하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김씨는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아파트를 임대받지 못하는 등 숱한 차별을 받았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 같은 차별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내 생활도 갈수록 팍팍해졌다. 물질뿐만이 아니라 내면도 공허하고 메말라갔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마침 일본인 친구가 전기공업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한테 찾아갔다가 청산가리를 훔쳐와서 단번에 마셔버렸다. 공업용 청산가리였기에 금방 죽지는 않았다. 정신을 잃고 있는데 미국 지프차를 개량한 경찰차가 왔다. 병원으로 이송당한 뒤 다 토해냈다. 그때는 죽지 않은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사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죽는 것마저도 힘든 상황에서 김씨가 곁에 있는 게 그나마 큰 힘이 되었다. 김씨는 6·25가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제주대 교수를 하다가 전남대로 옮긴 뒤 몇번 만나다가 연락이 끊겼다. 전남대 수의학과에 전화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지난해 5월 광주 5·18 기념관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혹시 김오남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끊어 광주를 찾아갔다. 행사장엔 김씨가 없었다. 전남대에 가서 김씨의 사진을 보여주며 근황을 물어봤지만 이미 은퇴를 했다고 했다. 다시 길을 물어 찾아갔더니 어떤 목사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슬프고 허탈했다.

언젠가 김씨가 내게 부탁한 게 있다.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 본 건데, 나무에 백합화가 피는 신기한 식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한국에 올 때 그 씨를 꼭 가져와달라고 했다. 일본에서 겨우 씨를 입수해 봉투에 넣어 제주도로 가져간 적이 있다. 하지만 통관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에 줄 선물’이라고 간곡하게 부탁해 겨우 통관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김오남은 그 씨를 분명 어디에 심었을 것이다. 전남대에는 없었다. 지금 한국의 어딘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