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7) 中 산둥성 라이양 선교사의 집념

입력 2011-10-20 18:03


3번 부름 받은 박태로, 복음을 심고 스러지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중국 산둥(山東)성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선교 재정을 전국 교회의 감사헌금과 헌물로 충당키로 했다. 당시 사회 여건상 감사절에 가장 많은 헌금과 헌물이 걷혔다. 1년 교회경상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액수였다. 각 교회의 감사절 헌금은 노회 담당자에게 보내졌다. 담당자는 그것을 총회 전도국으로 보내 선교 예산 책정 및 집행이 이뤄지게 했다. 선교사들은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만 재정 사용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 간 갈등이 생길 요소가 적었다.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 등 3명의 선교사에게 지출된 항목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 3인의 팔삭(八朔, 8개월분) 월급 690원, 팔삭 자녀금 143원, 어학선생 팔삭 월급 117원, 김영훈·사병순 등을 도와준 것 50원, 선교사 여행비와 이사비 134원 12전1리, 응접실 용비 19원 52전1리, 가옥세금 200원, 특별비 78원 86전8리, 수리비 198원 34전9리, 전도비 12원 82전4리, 김찬성 시찰여행비 62원 1전, 박태로 시찰여행비와 월급 291원 79전 등’(1914년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계보고)

선교사들은 귀국하게 될 때마다 전국 교회를 돌며 사역 보고만 하면 됐다. 3명의 선교사 가운데 사병순 목사는 본국 교회에서 선교사역 보고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사역을 끝마쳐야 했다.

3명의 선교사 대열에 이상이 생기다

취재팀은 문서 선교의 효과를 묘한 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취재에 동행한 현지인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산둥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 사역자에게 전달받은 책에 나와 있는 중국인 이름과 주소, 관련 사진 등을 갖고 취재팀이 만나야 하는 사람과 가야 할 장소를 척척 찾아냈다. 이 모습을 보며 초기 선교사들이 중국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문서를 통한 전도로 교회를 일궈낸 게 결코 허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3명의 선교사는 산둥성 라이양(萊陽) 사람들을 모으고 전도하는 데 힘썼다. 중국에서 전례가 없었던 주일 강론회와 수요일 기도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1915년 봄, 박 목사의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 그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주 기침이 나고 열이 났다. 마침내 박 목사가 더 이상 사역하기 어려워졌다. 1916년 4월 26일 박 목사와 그의 가족은 김영훈, 사병순 목사와 그들 가족과 작별을 고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박 목사 가족은 인천, 경성(서울)을 거쳐 황해도 봉산 사리원으로 이동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심해져만 갔다. 1916년 6월초 그는 경성 남대문밖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내과의사는 박 목사 병의 이유를 정확하게 찾지 못했다. 단지 위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소견만 내놓았다.

병중에도 박 목사는 그해 9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했다. 그는 전도국장인 김익두 목사의 사회로 열린 ‘강설회(講說會)’에서 중화민국(中華民國) 선교 상황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그의 보고는 ‘어떻게 감사로 보답할

꼬’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다. 당시 어법이 쉽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보고를 현재 통용되는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부족한 이 사람이 선교사가 되고 조선인으로서 중국에서 사역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선교지에서 천대를 받은 것도 감사드립니다. 고생과 병중에 있을 때 위로받은 것도 감사드립니다.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믿는 이들이 점차 증가했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이로부터 복음서를 구입한 군인 한 명이 자신의 동료를 전도한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중국인들이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눠준 전도지를 끔찍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 강의도 잘 경청하기에 전도 가능성이 큽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 말씀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박 목사의 철수는 가뜩이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역하던 두 선교사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김영훈 사병순 목사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1917년 봄 총회 전도국의 허락 없이 선교지를 떠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에 총회 전도국은 치료중인 박 목사에게 ‘SOS’를 쳤다. 그는 방효원(方孝元) 목사와 함께 다음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할 때까지 임시로 라이양으로 다시 나가기로 했다. 그의 중국행은 세 번째였다. 그러나 앞선 두 차례와는 달리 병약한 몸에 의지한 행로였다.

1917년 5월 7일 박태로, 방효원 목사는 고국을 떠나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9일 만에 라이양에 도착했다. 라이양의 중국인 성도들은 이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10리 밖까지 나와 선교사 일행을 맞이했다. 다음날에는 라이양 외촌(外村)에 있는 교우 43명이 모여 환영모임을 열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같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맞이한 것처럼 현지 성도들은 선교사들을 몹시 좋아했고 존경했다.

박 목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또 전도에 나섰다. 그의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당시 라이양 교회는 세례 받은 성도 18명 등 53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박 목사는 서리집사 2명을 세워 교회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위중해져 옌타이(煙臺)로 떠나야만 했다. 교우 30여명이 새벽에 모여 그를 위해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박 목사는 옌타이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옌타이 출신 교우들의 간호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이었다.

박태로 선교사, 1918년 주님 품에 안기다

백약이 무효였기에 박 목사는 또 다시 고국행을 서둘러야 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픈 몸을 이끌고 총회 전도국의 뜻을 거절하지 않고 방 목사와 함께 다시 라이양을 찾은 그에게 있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선교사란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는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스스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자기 몸을 아끼는 게 사치스럽다고 박 목사는 느꼈을 것이다.

박 목사는 목회자로서 총회의 요청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황해도 재령읍교회의 위임목사 직분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 선교사가 될 것을 요구받고 중국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려 했다. 귀국한 박 목사는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걷기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곧바로 경성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6개월간 치료를 받고 세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들조차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박 목사는 사리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한 번 누우면 옮겨 누울 수 없을 정도였다. 1년간 몸 한쪽만을 의지한 채 누워있어야 했다. 박 목사 부인의 주름살은 늘어가기만 했다. 자녀들도 한숨 속에서 지내야 했다. 박 목사는 결국 사리원 자택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1918년 9월 6일. 그의 나이 48세였다.

박 목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사리원 서부교회 앞에 있는 집에서 할머니가 된 박 목사 부인과 그의 아들이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질 뿐이다. 9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 초기 선교사 박태로 목사’의 이름은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역사와 중화기독교회연감(中華基督敎會年鑑)에 똑똑히 기록돼있다. 박 목사의 개척 정신과 희생위에 산둥 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박태로 선교사 평양총회 참석 보고

“부족한 이 사람이 선교사가 되고 조선인으로서 중국에서 사역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선교지에서 천대를 받은 것도 감사드립니다. 고생과 병중에 있을 때 위로받은 것도 감사드립니다.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믿는 이들이 점차 증가했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이로부터 복음서를 구입한 군인 한 명이 자신의 동료를 전도한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라이양=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 사진 서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