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 브뤼’ 작가 김정명에게, 그림이란?… 환영과 환청, 그림이 되다
입력 2011-10-20 14:40
그 아이와는 누구도 짝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 아이와는 누구도 함께 밥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 아이와는 누구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아이는 외톨이였다. 아이는 슬펐다. 아이는 좀 달랐다. 친구들이 동화책을 읽을 때, 아이는 백과사전을 읽었고, 친구들이 뭘 하고 놀지 고민할 때, 아이는 우주의 끝이 어디일지 고민했다.
아이는 소녀가 됐다. 소녀는 괴롭힘을 당했다. 슬펐다. 우두커니 멍한 표정에 말을 하지 않았고, 웃지 않았고,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고, 어느 날엔 화장실에서 혼자 움츠린 채 햄버거를 먹기도 했다.
소녀는 여자가 됐다. 여자에겐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그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용기 내 몇 번 찾아가도 봤지만 남자는 여자를 외면했다. 여자는 슬펐다. 여자는 그런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 그림을 전문가들은 ‘예술’이라 불렀다. 여자에겐 그림이 유일한 낙이고, 벗이다. 그림을 그리고는 그림을 향해 말을 건다. “친구야 안녕?”
“김정명 작가님 안녕하세요.”
조금 다른 그녀를 만난 건 18일 낮 12시 부산 광안동 신부산교회 앞에서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는 걸음걸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이름은 김정명. 1980년생으로 올해 나이 서른하나. 그림을 그려 먹고 살며, 작은 소품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나는 그녀를 ‘작가님’이라 불렀다.
김 작가는 광안동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자신의 가게로 안내했다. ‘보도리의 조그만 가게’라는 작은 문패가 걸린 아담한 가게. 통유리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동전지갑, 가방, 앞치마 등 아기자기한 소품과 일러스트 작품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서울 인사동이나 홍대 앞에서 볼 수 있는 핸드메이드 가게다. 앞치마 2만원, 가방 1만5000원, 동전지갑 2000원…. 서울에서 핸드메이드 제품을 이 정도 가격에 사면 횡재다. 1년 전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작가는 일러스트를 맡는다고 했다.
-잘 팔리죠?
“안 팔리요. 한 달에 10만원, 20만원 판다 아입니꺼.”
가게 안에 딸린 방에서 어머니(57)가 나와 하는 말이다. “동네 사람들은 와보고는 ‘그림만 없으면 사 갈긴데’ 그럽니더.”
가방을 들여다보다 작가에게 가장 예쁜 제품을 추천해 달라 했다.민트색 천에 나무가 그려진 그림이다. 나무가 근데 조금 이상하다. 사람 뇌에 피어난 나무다.
나는 평범한 꽃이 그려진 작은 손가방을 골랐다. 그러곤 김 작가와 하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짜장면이나 시켜 먹자 했더니 김 작가 왈. “짜장면 같은 거 안 먹어요.”
“정신분열증이요.”
이 얘긴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 작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외톨이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발병했어요.”
김 작가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에 한 번, 잠들기 전 한 번 약을 먹었다. 이날은 상태가 좋은 날이라 했다.
“나는 처녀다. 성모마리아는 처녀다. 나는 성모마리아다. 그런 식으로 과대망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통이 안 되죠.”
환청과 환영에도 시달렸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헐크처럼 ‘으르르르’ 소리를 낸댔다.
가족은 그러나 오랜 기간 그녀의 병을 몰랐다. “초등학교 때 아 학교 선생님께서 그러시데예. ‘정명이 어머님, 애가 좀 이상합니다. 키우기 힘들겠습니더.’ 그때만 해도 몰랐지예. 사춘기라 그런갑다. 아 아빠는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카고.”(어머니)
그녀도 몰랐다. 다만 남들과 다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진학도 했다. 병을 발견한 건 2003년의 일이다. 동서대 멀티디자인과 4학년 때, 오치규 교수(현 충남대 교수)가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오 교수는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에 타과생인 그녀를 참여시켰다. 그녀는 오 교수에게 그림을 가르쳐달라 했고, 오 교수가 그녀에게 연습장 한 권을 그림으로 채워보라는 숙제를 내주면서 스승과 제자가 됐다. 3일 만에 70장짜리 연습장 한 권을 그림으로 가득 채워 가져온 그녀. 단순히 독창적인 그림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교수님 방에서 그림 그리던 OO가 저랑 비슷한 거 같아요.”
“걔 좀 아픈 애야. 너처럼.”
그때 자신의 병과 처음 대면한 김씨. 신경정신과 의원을 찾아갔고,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그림에 미치다
온전히 그녀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그 해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키운 김씨. 디자인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 디자인학과에 들어갔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릴 기회는 없었다. 입시를 위해 아그리파 석고만 숱하게 데생했고, 대학에선 컴퓨터 작업에만 매달렸다.
병을 알려준 오 교수는 그림에 대해서도 힌트를 줬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떼어 내 그려보라고 한 것. 눈을 감았다. 어느 날엔 벌겋게 충혈 된 눈이 보였고, 어느 날엔 머리가 두 동강이 난 사람이 보였고, 어느 날엔 발이 11개 달린 사람 모양의 달팽이가 보였다. 환영을 매일 그려나갔고, 그림이 수북이 쌓일 무렵 오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정명아, 생각이 많이 정리됐구나.”
환영을 그리면 덜 아팠다.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으며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2005년 부산 남포동 ‘미술의 거리’에 작가로 입주한 그녀. 거리에 벽화, 벽지, 음식점 간판 등 그녀의 그림이 하나 둘 들어갔다. 1000원에 인물스케치를 그려주는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얼굴 그려주는 사람’으로 소문도 났다. 마임 하는 사람, 서양화가, 연극인 등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녀는 외톨이였다.
“넘(남) 보기가 안 좋다고 그만 나가라카는 거라예. 행동이 부적절해서 회의에서 다수결로 그래 결정냈다면서예.”
어머니는 참았던 분을 터뜨렸다. 김 작가는 하지만 2년 계약기간이 끝나 재계약이 안 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인쇄소에 취직도 해봤다. 인쇄소에서도 3개월간 외톨이로 지내더니, 결국 월급도 못 받은 채로 나오게 됐다. 작품 요청이 가끔 들어오긴 했다. 일러스트 100장 그리면 30만원이 입금됐다. 지하철 역 무료 전시공간에 작품도 걸어봤다. 사람들은 ‘저것도 그림이냐’며 손가락질했다.
그녀는 ‘아르 브뤼’ 작가
한시도 딸과 떨어져 지내지 못한 김 작가의 어머니. 고운 얼굴엔 그간 마음고생 때문인지 깊은 주름이 파였다. “지하고 내뿐인 기라예. 고마 막 뛰어 내릴라 해싸고, 죽을까 싶어서 못 놔두고.”
아버지의 눈엔 모든 게 못마땅했다. “고등학교 마치고 시집이나 보낼 걸 잘못했다.”
정신장애인재활시설인 ‘송국클럽하우스’에 딸을 보내기도 했다. 김씨는 그곳에서도 그림만 그렸다. 그 무렵, 서울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의 김통원 교수는 한국 아르 브뤼(Art Brut)를 결성, 작가를 물색 중이었다. 아르 브뤼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생(原生)예술로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탄생시킨 장르다. 기성 작가의 작품을 뛰어넘는 정신장애인의 예술은 아르 브뤼의 꽃이다. 김 교수는 용인정신병원부터 시작해 전국 각지의 정신장애인 시설과 병원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만다라만 그리는 남자, 육감적인 여자만 그리는 40대 미혼녀 등등. 발굴해낸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특한 정신세계를 표출했다. 부산에는 김 작가가 있었다.
“김정명 작가 그림은 아주 기발해요.”
사재를 털어 아르 브뤼 작가를 발굴해내고 작품을 사들이던 김 교수는 그녀의 안팔리는 그림도 매달 구입했다. 그리고 2009년 10월 7일, 5명의 정신장애인을 주축으로 한국 최초의 아르 브뤼 전시회가 열렸다. 작가 김정명이 대한민국 최초의 아르 브뤼 작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날이다. 지난달 28일, 김 교수는 김 작가를 비롯해 아르 브뤼 작가 21명의 그림 340여점을 소개하는 책 ‘Korea Art Brut’를 영어와 불어판으로 펴냈다.
보도리의 꿈
18일 오후 2시. 광안리 바닷가 한 일식집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가장 좋은 식당에서 최고의 음식을 먹고, 가장 예쁜 카페에 들어가 가장 맛있는 차를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겐 중요한 일이다. 사회적 기업 ‘한국 아르 브뤼’의 전속 작가가 돼 월급 83만원(세전 105만원)을 받으면서 배포가 더 커진 것도 같다. 어찌됐건 수입은 식비로 다 나간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하는 김 작가. “점심 특선 셋 주세요.”
그녀는 예전보다 살이 쪘다고 했다. 살 빼려고 2주 전부터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고, 줄창 줄넘기를 하다 보니 똥배가 조금 들어갔다 했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잠깐이나마 쉴 여유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림이란?
“내 삶이 그림이다. 인생 자체가 그림이다. 흰 종이를 보면 뭐가 그려질지 짐작할 수 없다. 인생도 그렇다.”
-행복한가.
“행복하다. 옛날에도 행복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왜 미치는 건가.
“독이 든 우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먹었는데, 임금은 안 마셨다. 마을 사람들은 임금이 미쳤다고 했다. 임금이 물을 마셨더니 마을 사람들이 임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랬다더라.”
-꿈이 뭔가.
“이대로만 유지하면 좋겠다.”
-가족이란?
“친구를 사귀어도 엎어지면 아무도 돌아보질 않는다. 가족은 거들어주는 거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보도리 가게 2인자다. 동업자다.(일러스트에는 그녀가 보도리, 어머니는 쥐순이로 표현돼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나라 요시토모.”
-외롭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고독하다. 어머니랑 같이 있어도 되게 고독하다.(그녀는 혼자선 작업을 하지 못한다)”
-언젠간 혼자 남을 텐데.
“되게 두렵더라. 근데 상황이 달라질 거다. 삶이 점점 나아지더라.”
그녀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블로그 ‘정명이의 행복공간’에 들어가 봤다. 가게만큼이나 예쁘고 아기자기 했다. 자신의 ‘분신’이라는 보도리. 아기 곰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한 보도리를 작가는 이렇게 소개했다.
‘보도리의 장점: 귀엽고 착함. 여러분 보도리를 많이 사랑해 주세용∼’
부산=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