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스포츠에서 예절을 생각하다
입력 2011-10-19 18:03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때로 기억된다. 조직위원회는 썰렁한 테니스 관중석을 채우기 위해 서울올림픽공원 인근 초등학생들을 동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테니스 경기규칙을 알 리 없는 학생들은 경기관전보다 코트 곳곳을 옮겨 다니며 외국인 상대 ‘사인받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경기는 이들로 인해 중단되기 일쑤였다. 게임이나 세트가 끝날 때를 제외하고는 경기 중에 이석조차 금지돼 있는 엄격한 테니스 관전 매너는 철저히 외면을 받았고, 애꿎은 주심만 “비 콰이어트 플리즈(Be quiet please)”를 하루 종일 외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야구장, 축구장 가릴 것 없이 꽉꽉 들어차는 관중들로 인해 경기장 에티켓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멋진 경기는 선수와 관전자가 제 역할을 다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 선수가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면 멋진 경기를 볼 권리가 있는 관전자는 이를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기는 관전자의 교묘한 방해 행위가 응원문화 속에 녹아 흥미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프로농구(NBA) 원정팀은 자유투를 방해하려는 홈 관중의 시선교란용 응원도구를 이겨내야 하고, 부산 사직구장의 원정팀 투수는 1루 견제 시 부산팬들의 독한 함성에 시달려야 한다. “마! 마! 마!”
경기장의 매너는 경기장마다, 나라마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독특한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관중들의 매너가 도마 위에 오른 곳은 뜻밖에 골프장이다. 골프대중화에 따라 골프대회 관람객(갤러리)의 수도 급격히 늘었다. 인천 영종도의 스카이72 골프장에서 최근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하나은행 챔피언십 마지막 날 경기에는 2만3000명이 찾아 인산인해를 이뤘다.
늘어난 갤러리 중에는 제멋대로인 사람들도 있었다. 꼭 그날 갤러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수들이 티샷한 볼을 모르고 들고 가는 사람, 티샷을 준비하는 선수에게 포즈를 취해달라는 사람, 전화벨은 곳곳에서 터지고, 퍼팅하려는 외국선수를 방해하려는 애국자(?)들까지. 마치 86아시안게임 테니스장 초등학생의 재림이라고나 할까. 결국 최경주 선수가 총대를 멨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첫 대회인 CJ인비테이셔널에 갤러리의 휴대전화 지참을 금지한 것. 대회 조직위는 휴대전화 보관함을 설치하기로 했다.
반면 선수의 에티켓은 스포츠맨십에 다 녹아있다. 스포츠맨십은 근대 스포츠의 요람인 영국의 신사도와 맞닿아 있다. 근대 스포츠는 고대 올림픽에서 기원하지만 이를 제도화하고 근대화한 것은 영국이기 때문이다. 스포츠맨십의 핵심은 동일한 규칙 속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3세의 대군과 겨룰 때 야습을 제안하는 부하들에게 “나는 승리를 훔치기 싫다”며 거부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1998년 LPGA 투어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선수가 첫 우승을 하던 순간, 그의 매너가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통상 골퍼는 경기가 끝나면 먼저 동반자에게 예를 갖춘 뒤 자신은 물론 동반자의 캐디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박 선수의 아버지가 감격에 겨운 나머지 예를 갖출 시간도 주지 않고 그린으로 뛰어들어 딸을 포옹했던 것이다.
이번 주말 개막되는 프로배구에도 언젠가 고쳐야 할 선수 에티켓이 있다. 배구 경기를 하다보면 스파이크가 블로커의 손가락을 맞고 나갔는지, 그냥 아웃됐는지 육안으로 판단하기 곤란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국내 프로배구는 일찌감치 비디오 판독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해당 선수가 미리 ‘자수’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들키지 않도록 표정관리 잘 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우기는 관계자가 있을 정도다. 초고속카메라로 판정이 내려지기 전 선수가 먼저 터치아웃을 시인하는 것을 제도화하면 어떨까. ‘정직’이란 무기를 장착한 프로배구의 새로운 볼거리가 될 듯하다.
서완석 체육부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