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은 결국 지나간 것이 된다… 연극 ‘레드’, 추상표현주의 화가 로스코 예술 세계 그려

입력 2011-10-19 21:22


“이봐, 삶에서 두려운 게 딱 하나 있거든.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릴 거라는 거야.”

극중 주인공인 마크 로스코의 말이 대변하듯 블랙은 죽음과 소멸을 상징한다. 반면 레드는 열정과 뜨거운 피다. 연극 ‘레드’는 다양한 붉은 색의 향연으로 추상표현주의 시대의 절정을 보여준 러시아 출신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와 가상 인물인 로스코의 조수 켄(Ken)을 통해 로스코의 예술세계와 삶을 재구성한 2인극이다.

1958년 로스코는 비싸기로 소문난 포시즌 레스토랑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벽화를 그려주기로 계약했다. 이야기는 로스코의 벽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업을 함께하는 켄은 물감을 섞어 색을 조합하거나 캔버스를 짜는 단순한 일만 하는 조수지만 로스코의 자존감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인물이다. 둘의 대화는 일면 격렬하고 일면 철학적이다.

“너 정말 앤디 워홀이 백년 뒤 미술관에 걸릴 거라고 생각해? 브뤼겔과 베르메르와 함께?” “지금 걸려 있는데요?” “그야 그 빌어먹을 갤러리들은 돈이 된다면 뭐든 하니까. 어떤 사악한 취향이라도 맞춰주지. 그건 비즈니스야,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예술이 어때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

로스코는 기고만장하게 자신과 친구들이 큐비즘을 몰아냈다고 말했지만, 새로운 시대가 다시 오고 말았다. 세상은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으로 상징되는 팝아트 천하였다. ‘레드’는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이 되고 기존의 것은 쇠퇴하는 인생무상과 필연성을 예술가의 고뇌를 통해 드러낸다.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 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로스코와 켄은 아버지와 자식으로 확장되고, 이어 과거와 미래로 대비된다. 그러니 로스코와 결별한 켄이 갈 길을 찾아 나서는 마지막 장면에선 감동과 비감이 함께 묻어나올 수밖에. 젊은 켄은 예술이 예술가의 것이었던 시대에서 대중 속으로 풀려나온 시대 속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화가의 붉은 작업실을 제대로 재연한 무대와 조명 속에서 더욱 빛났음은 물론이다.

존 로건 원작, 오경택 연출. 로스코와 켄 역에 강신일 강필석이 열연했다. 다음 달 6일까지 서울 필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2010년 제64회 토니상 6개 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전석 4만4000원.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