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 장권사님 ‘잣죽’과 두꺼비 이모 ‘감자탕’
입력 2011-10-19 17:45
겨울이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네요.
동틀 무렵 살포시 열린 창문 틈새로 느껴지는 알싸한 기운은 겨울을 코끝으로 전해줍니다. 유난히 감기환자가 많은 10월, 편안히 보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유난히 힘든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고와 입원 그리고 재활치료로 이어지는 시간들이 석 달째 되어가는 지금, 바짝 말라버린 몸과 마음이 쉬어가라고 제게 이야기하고 있네요. 이런저런 벌인 일들도 많고, 하던 공부도 미룰 수가 없어서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제 몸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안 듣다가 기어코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건강한 체질을 자랑하고 살았는데 얼마 전부터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말았던 것이지요. 새벽녘 심한 위의 통증으로 잠이 깨 약을 챙겨먹고 찜질을 해 겨우 잠들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입맛은 떨어지고 얼굴 또한 까칠해지고 있습니다.
불현듯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잣죽이 먹고 싶어지니 그야말로 몸 상태는 더 나빠지고 말았지요. 혼자 죽을 끓여먹자니 괜히 처량스러워 주저하고 있는데 약국 문을 빼꼼히 열고 환하게 웃으시며 들어오는 장 권사님 손에는 하얀 종이쇼핑백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 이 집사 요즘 얼굴이 안 좋길래. 우리구역예배 끝나고 저녁 먹으러 죽집에 갔다가 생각이 나서 한 그릇 사왔지. 자 어여 한술 떠. 잣죽이야.” “잣죽 좋아하지?” 곱게 간 잣을 넣어 끓인 뽀얀 잣죽 한 그릇이 짠하고 거짓말처럼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고소하고 따스한 잣죽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장점순 권사님 고맙습니다. 저를 향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다음날에도 이어졌습니다.
씩씩한 두꺼비 이모가 감자탕을 끓였다고 먹어보라고 한 그릇 가져왔습니다. 우거지를 야들야들 삶아 집된장으로 맛깔나게 버무려서 돼지등뼈와 통감자를 함께 삶아 얼큰한 맛이 가득한 정말 제 어머니가 만든 감자탕을 제게 맛보게 하신 두꺼비 이모는 미아리 집창촌에서 야식장사를 하던 분이신데 며칠 전부터 골목입구에 작은 반찬가게를 시작하였습니다.
저녁 8시에 시작하여 아침 8시까지 한밤을 꼬박 새워 장사를 합니다. 충무김밥과 순대, 떡볶이, 만두 등으로 미아리 사람들의 피곤한 입맛을 달래주고, 밤낮을 바꿔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이기에 김치 담그고 국 끓이는 일조차 버거운 사람들에게 쫄깃한 찹쌀밥과 해장국 또는 육개장으로 무거운 하루 일과를 살포시 내려놓게 합니다.
제가 약국이 끝나는 아홉시쯤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하십니다. “자기야, 저녁 먹고 가.” 덕분에 제 저녁시간은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이 커다란 나무도마 위에 두꺼비 이모의 정성가득 담긴 갖가지 반찬들이 올려져 있지요.
아주 행복한 저녁시간은 제 무거운 일상을 조금 덜어내곤 한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챙긴 음식을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마음을 가득하게 만드는 소중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혹은 얼굴은 모르지만 이 음식 먹고 힘을 내 고단한 삶을 헤쳐나갈 그 누군가를 위하여 배추를 다듬고 감자를 깎는 손은 참으로 위대한 손입니다. 따스하게 앉아보지도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그분들의 삶이 세상의 잣대로는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재시는 잣대로는 아마 그 끝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그분들의 손과 발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축복을 허락하셨고 여기까지 이끌고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크신 축복을 허락하시기 위해 장 권사님과 두꺼비 이모의 어린 시절을 그리 큰 환난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환난이 소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채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들이 행여나 지쳐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하염없이 기도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축복의 손길로 쓰고 계시는 두 분의 건강을 지켜주시옵소서. 그분들의 손과 발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도 사랑에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이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