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3) 아버지의 유언 “난 주님 품으로… 너희도 믿음을”

입력 2011-10-18 17:51


내가 자란 교토(京都) 니시진은 직물 생산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최고급 기모노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대부터 직물 기계를 만들었다. 그 니시진 안엔 교회가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거기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노무라 지이치(野村治一)였다. 아버지도 유년시절부터 그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는 나중에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행정법학 교수가 됐다. 당시 일본 교계에서는 빈민·노동운동을 펼치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고베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에서도 사회복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의 서남동 박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아버지 역시 가가와 목사의 사회복음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권력을 늘 비판했다. 당시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로 봐서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아웃사이더’였다.

어머니 노무라 가츠코(野村勝子)와 아버지는 한 교회에서 같이 주일학교를 다녔다. 그만큼 두 사람은 친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집안 배경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집안은 부르주아였지만 어머니 쪽은 아주 가난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냉대의 강도는 셌다. 나 역시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해서 바보 취급을 당했을 정도니까. 그것은 또한 우리 집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봉건주의 시대 일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아버지는 1936년 여름,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폐결핵 때문이었다. 당시엔 폐결핵은 곧 죽는 병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나는 지금까지 좋은 인생을 살았다. 돌아보면 감사한 일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 너희들도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굳건히 인생을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분이었지만 내 기억 속엔 아버지에 대한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기억나는 일은 만두 심부름을 갔다 와서 꾸지람을 들었던 것밖에 없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유명한 분들이 많았다. 그중 다바타 시노부 같은 헌법학자는 평화헌법을 지켜가자는 운동에 앞장섰을 정도로 명망있는 학자였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기독교 사회정의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영향 때문에 어릴 적부터 당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 멸시를 피부로 느끼게 됐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노무라 패밀리에서 완전 제거되셨다. 나와 여동생도 어머니를 따라 빈민가 동네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곳이 바로 교토의 니시진이었다. 거기서 일본인도 그랬지만 조선인들의 혹독한 생활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학 교육의 첫걸음이었다. 만약 그러한 기독교의 영향, 니시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무신론적인 사회운동가가 되었거나 역사의식이 전무한 이론가가 되었을 게 뻔하다. 여동생은 나중에 양녀가 되어 도쿄로 옮겼다. 그 후로 지금까지 도쿄에서 살고 있다. 여동생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나보다 소신이 더 뚜렷하다. 지금도 한국의 푸르메재단과 함께 일본이 가져간 한국의 유적을 되돌리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