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2) 나를 깨운 어린 날의 슬픈 기억 ‘조선인 차별’

입력 2011-10-17 21:02


4∼5세 때라고 기억한다. 당시 나는 교토(京都)에 살고 있었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버선과 고무신을 신은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머리에 물건을 이고, 양손에는 뭔가를 들었으면서 그렇게 균형을 잘 잡은 채 걸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은 그들을 ‘조센진’이라고 불렀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어린 시절 그들은 나에게 ‘낯선 사람’으로 기억되었던 것 같다.

당시 교토엔 ‘니시’라는 진(陣)이 있었다. ‘서쪽 진’이란 뜻이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뒤 조선 정복에 나섰던 도요테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교토에 머물 때 구축한 진지라는 데서 나온 지명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엔 옛날부터 매춘부와 노동자들이 많았다. 노동자도 하층계급이었지만 그 밑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조선 사람들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직물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을 경영했다. 기계를 만들거나 수리하고, 부품을 판매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조선 사람들이 가끔 돈을 지불하지 않고 부품을 가져간 것이다. 그만큼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품을 외상으로 빌려갔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선뜻 그 외상을 허락했다.

내가 다니던 소학교 반엔 조선학생이 2명 있었다. 난 1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늘 그 두 명과 같은 반이었다. 두 명 모두 박씨, 그중 한 명의 이름은 박원장 혹은 박원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은 공부도 싸움도 잘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반의 대표는 되지 못했다. 그 당시는 일본의 대동아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일본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점령했는데 그걸 기념해 학교 이름도 소학교에서 국민학교로 바꿔 불렀다.

전국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전쟁 승리의 선물로 고무공을 나눠줬다. 그렇지만 두 명의 박군은 고무공을 받지 못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두 박군이 불쌍하기도 했고, 정부나 학교의 처사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먹는 문제도 심각해졌다. 무엇보다 입을 것이 없는 게 큰 문제였다. 정부는 교복 대신 학생용 옷을 만드는 천을 무료로 나눠줬다. 그 천은 무거웠고 아주 차가웠다. 일본 어린이들은 예외 없이 그 천을 받았다. 하지만 두 박군에게는 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 장면 역시 나에게 큰 충격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조선 친구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중학교는 교토 부립(시립)이어서 조선 학생은 입학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에 진 뒤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자 내 일본 친구 한 명이 도쿄 신주쿠로 가서 신문을 팔았다. 그때 마침 ‘6·25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호외판이 나왔다.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는 일본 사람들도 먹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 사람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호외판을 보며 나는 문득 ‘두 박군은 어떻게 됐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소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두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조선 사람들, 특히 북한의 어린이들과 할머니들을 매일 생각하는 것은 내 한구석에 그런 슬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