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독일의 스승 필립 멜랑히톤 (下)
입력 2011-10-17 17:43
루터파는 영웅 원했지만, 종교화해 협상 나선 그는 우유부단했다
1530년 황제 카알 5세는 종교화해를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말은 종교화해였지만 황제는 보름스 칙령 이래 반종교개혁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 해 전에도 황제는 종교개혁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프로테스탄트라 불렀다. 황제 말을 듣지 않는 항거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루터가 1517년 95개조 논박문을 붙인 이래 13년이 지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제후와 귀족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황제는 1526년 제1차 스파이어 제국 의회를 열어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제후와 귀족들이 루터의 개혁신앙을 고백해 오히려 종교개혁을 인정해야 했다. 황제는 제2차 스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앞서의 결정을 철회하고, 종교개혁을 억제할 것을 결의했다.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진영은 황제의 종교정책에 항의하는 공식적 문서를 보내고, 전선을 가다듬었다. 신교와 구교 측의 ‘올바른 신앙’에 대한 논쟁은 제국의 분열을 위협했다.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 화해가 필요했다.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다시 소집해야만 했다. 이때 루터는 모든 법적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라 코부르크 성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대신 멜랑히톤이 협상에 참석했다. 루터는 멜랑히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협상에 관여했다.
황제는 신·구교 양측에 신앙고백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멜랑히톤은 프로테스탄트 측의 신앙고백서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해 몇 번의 수정 끝에 제출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총 28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28개조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조에서 21조까지는 종교개혁가들의 신앙과 교리를 기술했다. 22조에서 28조에 이르는 둘째 부분의 나머지 7개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비판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에 담긴 루터의 성만찬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측 내부의 분열을 담고 있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그것을 상징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가 갈리게 된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츠빙글리는 제국의회에 ‘신앙의 원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절충적 입장을 취했던 마르틴 부처도 독일 남부 4개 도시의 신앙고백서인 ‘4개 도시 신앙고백서’를 따로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였다. 사실 멜랑히톤도 루터의 성만찬설과 다른 입장이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서는 루터의 입장에 충실하려 했다. 원래 멜랑히톤은 ‘신학강요’ 때부터 성만찬설에 대해 루터와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1540년에 가서 그는 이 조항을 수정해 영적 의미만을 인정했다. 그리고 노예의지론도 수정해 구원은 성령과 인간의지의 공동작용이라는 신인협동설을 취했다. 그러나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성만찬설을 두고 보면, 멜랑히톤은 충실하게 루터를 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멜랑히톤의 협상 태도에 불평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보여준 대담하고도 용기 있는 신앙태도를 기대했다.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에 맞는 행동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무가 기독교를 위협하는 분열을 막는 것이라 생각해서 조심스러운 전술과 외교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황제에게 호의적인 어법을 사용했고, 루터의 교리가 보편적인 가톨릭 교리와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우유부단하고, 너무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루터가 협상과정에서 너무 양보를 많이 했다고 멜랑히톤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의 입장을 끝까지 두둔하고 신뢰했다.
“나는 멜랑히톤이 쓴 변론문을 다 읽어 보았다. 그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고, 더 고치거나 수정할 것이 없었다.”
멜랑히톤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의 동의와 제후들의 서명을 받아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 그러나 황제는 생각이 달랐다. 가톨릭 측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반박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반박서에 대항하기 위해 멜랑히톤은 신앙고백서의 7배가 넘는 변론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접수하지 않고 가톨릭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교화해가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다시 전쟁의 위기가 감돌았다. 루터는 황제에 저항하기 위한 폭력적 저항의 정당성을 인정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영주들은 천주교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였다. 황제는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도발과 전쟁을 획책했으나, 국내외 혼란한 상황과 영주들의 완강한 반발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종교 갈등은 계속 심화되어 독일은 내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다시 열린 제국의회에서 종교화해가 이루어졌다. 한 나라에는 하나의 신앙이 존재한다는 원칙 아래 ‘통치자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가 되도록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루터는 종교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루터 사후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당연히 멜랑히톤이 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멜랑히톤이 슈말칼덴 동맹 이후 종교회담에서 보여주었던 우유부단한 태도로 루터파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멜랑히톤이 순수 루터파와 관계가 악화된 결정적 계기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잠정안(Leipzig Interim)에 그가 동의하면서부터다. 그는 신앙을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본질적인 것이라 변할 수 없으나, 예배 의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과 관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소위 아디아포라 논쟁에서 순수 루터파를 자처하는 암스돌프와 일리리쿠스는 그의 태도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면서 거세게 비판했다. 이 논쟁을 벌일 때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작센의 선제후를 배반한 모리츠 밑에 있었다. 모리츠는 황제의 유혹에 넘어가 작센의 선제후를 배반하고 전쟁을 일으켜 프로테스탄트 측을 배신한 인물이었다. 작센의 선제후는 1588년 예나대학교를 신설해 멜랑히톤에 반대하는 신학을 세우게 했다. 이로서 순수 루터파와 필립파가 갈리게 되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루터파로부터 배척되었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변론서는 루터교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이 되었고, 루터파의 일치서에도 포함되었다. 멜랑히톤의 신앙고백서는 영국 성공회의 39개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1560년 사망해 평생 존경과 사랑을 보냈던 루터의 묘 곁에 묻혔다.
죽기 직전에 멜랑히톤에게 누군가 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늘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그러니 내게 더 이상 묻지 말기를!”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