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나도 몰랐던 나

입력 2011-10-16 17:38


나는 이제부터 말할 사건과 함께 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백하려고 한다.

며칠 전 부산역 인근 초량동의 한 목욕탕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우즈베키스탄 여성이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외국인 여성과 목욕하면 에이즈 감염 위험이 있다는 ‘어이없는’ 편견이 작용한 사건이라 많은 언론매체가 이를 다루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기사를 읽고 궁금증이 생겼다. 초량동은 부산의 대표적인 외국인 관광지인데 단순히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여러 신문 기사를 찾아 다시 읽어보니, 그냥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성매매를 한다고 추정되는’ 외국인 여성의 피부색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이 기사를 접하고 떠오른 내 경험을 고백할 차례다. 나는 몇 년 전 남미국가인 페루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고대 잉카문명을 간직한 신비한 나라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수도인 리마 곳곳에 있는 유적지부터 작은 뒷골목까지 발품 팔아 다녔고, 언제 다시 와보겠냐는 생각에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고대 잉카의 수도 쿠스코로 옮겨갔다. 두둥! 이제 여행이 본격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일단 첫날은 카메라 없이 다녀보기로 했다. 큰 배낭을 지고 고산지대인 쿠스코 시내의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다가 문득 평지였던 리마를 다닐 때보다 몸이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곧 이유를 알았다.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의 무게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였다. 앞서 리마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카메라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정확히는 소매치기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어깨와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다녔던 것이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조금만 허름한 옷을 입고 있으면 내심 경계했다. 사실상 내 주변을 지나가는 모든 페루인, 특히 남자들을 ‘도둑질한다고 추정되는’ 잠재적 범죄인으로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혹스러웠다. 나는 스스로를 인종이나 국가에 대한 편견이 없는, 문화적으로 꽤나 세련된 ‘세계인’이라고 여겨왔었다. 그런데 먼 이국땅에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두어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시 여행을 시작했고, 버짐 핀 얼굴의 어린아이와 오렌지도 까먹고, 산골에서 만난 아저씨가 건네주는 물도 나눠 마셨다.

안데스산맥을 걸어 마추픽추까지 도착하는 4박5일 동안 나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숭고하게까지 느껴진 안데스의 풍광은 몇 장의 어설픈 스케치와 함께 고스란히 내 기억으로만 남았다.

여기까지가 내 경험에 대한 고백이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어떤 경험을 가지고 계신지, 문득 궁금해진다.

서민정 문화예술교육진흥원 대외협력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