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회심-김수영 시인] 필리핀 오지 새벽에 본 환상… 난 하나님께 ‘행복한 항복’을 했다
입력 2011-10-16 17:29
마흔 넘어 필리핀 오지에서 받은 복음
3년 전 5월, 필리핀행을 결정한 건 순전히 ‘미친’ 짓이었다. 대통령부터 청소부까지 만나고 다니는 직업이라 하지만 그때까지 선교사님을 만나러 열대 오지로 날아갈 줄은 몰랐다. 글을 써서 돈을 번다고 하지만 아이 둘을 키우는 주부가 방학도 아닌데 2주일씩이나 장기 출장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행기표를 예약한 뒤에야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아이들 옷이나 챙겨놓고 가.”
‘언제 와, 어디에 가, 애들은 어떡해’라고 꼬치꼬치 따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선히 승낙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 1호 선교사로 필리핀에 파송된 지 30년 가까이 된 50대 독신여성. 눈앞에 나타난 선교사님은 13세 소년 같았다. 고집불통이지만 어딘지 허술해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해 보였다. 공산게릴라의 총알 세례를 받기도 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하는 등 복음을 전하느라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단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후예란 느낌은 어디에도 없었다.
환영은 받았지만 인터뷰는 한마디도 진행되지 않았다. 첫날 저녁식사 시간부터 동문서답, 아니 우문현답이 시작되었다. 나는 선교사님이 그간 한 모험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하필이면 첫날 저녁시간 대화의 주제는 중생체험, 거듭남이었다. 선교사님이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나는 “혹시 풍토병 때문은 아닌가요?” 따위의 질문을 해댔다. 덕분에 선교사님은 “아이고 주님!”이라고 몇 번이나 나직이 부르짖으셨다.
새벽 3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 때 앞으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낼지 난감했다. 엉터리이긴 했지만 난생 처음 기도라는 걸 했다. “하나님 저 인터뷰 잘해야 하거든요. 제발 선교사님이 경험한 걸 제가 알 수 있게 해주세요,”
그 새벽에 나는 깜빡 잠들었다 깨어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이 돌멩이처럼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달빛에 벽에 기어 다니는 도마뱀의 네 다리가 보일 뿐 아니라 누군가 울면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꿈은 아니었다. 4시30분, 나는 혼란스러움을 떨치려 세수를 하고 새벽기도를 드리러 갔다. 선교사님은 무슨 고할 게 많은지 울면서 세 시간 동안 기도를 했다.
예상한 대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인터뷰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모두 우리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동안 한 일을 말씀해 달라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에 그 한마디밖에 기록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물으면, 그게 다라고 단호하게 입을 다무셨다. 인터뷰를 더 한다는 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까 항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선교사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반드시 인터뷰를 성공하겠다는 직업인으로서의 오기보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나와 선교사님은 같은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을까?
선교사님과 내가 있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는 게 아니라 믿는 것, 스스로 깨우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선교사님은 충분히 말씀하셨지만 내가 납득을 못한 채 ‘제발 나를 납득시키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굼으로 갈 날만 기다리면서. 배를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야 닿는다는 선교지 라굼. 라굼에 들어가면 선교사님의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 행복한 항복
뚜게가라오에서 묵은 지 1주일째 되던 날, 마침내 라굼으로 향했다. 1시간가량 작은 나무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나루터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고삐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돼지새끼와 닭은 길을 뛰어다니고, 원주민 아이들은 맨발에 소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오지탐험 다큐멘터리처럼 모험은 시작되었다. ‘에라 몰라,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놀다가 가자! 문책당하면 출장비 물어내지 뭐!’
라굼에서 잔 첫날, 나는 붉은빛 속에서 깨어났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머릿속에서 20년 전에 읽은 시구가 떠올랐다. 사방을 둘러보니 샤갈의 그림 속 같은 장밋빛이었다.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와 앵앵거리는 모기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온 세상이 붉은 것이라면, 평생 동안 충혈된 눈으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선교사님이 걸어서 다녔다는 산길을 말을 타고 넘었다. 발과 엉덩이에 물집이 생겨 걷지도 말을 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일정이 끝나자, 나는 길 한가운데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정글에서의 노숙은 도시에서의 노숙과 달랐다. 40도를 웃돌던 낮과 달리 밤에는 뼛속까지 시려서 덜덜 떠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새벽에 나는 또다시 환상을 보았다. 두려웠으나 지극히 평화로웠다. 산 그림자다, 아니 말 그림자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야라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한 달 뒤에 나는 다시 뚜게가라오로 날아가 선교사님을 찾았다. 선교사님의 새벽기도가 더 이상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낯선 언어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왔다. 왜 우는지 몰랐지만 그렇게 오래 울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불통 불신자의 자세를 고집하며 선교사님을 괴롭혔다. 마지막 날, 선교사님과 밤새 죄에 대해 입씨름을 벌였다. 내 발밑으로 무엇인가 번들거리는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선교사님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오후 나는 공항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선교사님은 수십년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다녔던 너무나 익숙한 길을 말이다.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러다 허공에서 먼지처럼 풀썩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안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가 뼈와 가죽만 남은 듯했다. 마침내 나는 항복했다. 집에 오자마자 교회로 갔다.
“복음이 들어간 인간과 들어가지 않은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아니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더 이상 선교사님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짓말처럼 그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안될 줄 알았던 선교사님의 인터뷰도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날 세례를 받았다. 성경공부반인 줄 알고 겁도 없이 복음학교에 등록해서 개근을 하고 졸업을 한 데다 왕복 4㎞를 걸어서 새벽기도에 다닌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란 말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앞으로는 더욱 곤고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모두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힘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에 경배와 찬양을 절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간혹 선교사님이 하신 말을 떠올린다. 모두 그때 그 말씀대로 되고 있어 감사 기도를 드린다. 소설과 동화를 쓰는 남편도 드디어 어제 세례를 받고 말았다.
◇김수영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오랜 밤 이야기’, 에세이집 ‘안식월’ 펴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서 가족과 같이 주사랑교회를 섬기고 있음.
김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