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3)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1
입력 2011-10-16 17:55
항일운동 ‘눈엣가시’… 암살사건 조작 105인 유죄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항상 그 시대의 ‘고난 받은 공동체’였다. 브루스 W 윈터(Bruce W Winter)의 주장처럼 기독교는 항상 그 시대의 복지를 위한 시혜자(施惠者, 렘 29:7)였으나 그 시대의 ‘풍속을 따르지 않는 자’(행 16:21)라는 이유에서 박해를 받아왔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가치로 볼 때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널드 크리빌(Donald Kraybill)은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된 왕국’(Upside-down Kingdom)이라고 불렀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한국에서도 동일했다. 로마인들이 따를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고 박해받았던 초기 기독교처럼, 초기 한국교회는 유가적 윤리와 다른 가치를 전한다고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일제하에서는 정치적 이유에서 박해받기 시작했다. 그 첫 경우가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사건이었다.
해서교육총회
일본의 조선 지배에 있어서 1차적인 과제는 민족운동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족운동은 기독교 세력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1905년부터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구국기도회를 열어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일제는 1907년부터 한국에서 반일민족운동의 거점은 기독교회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서북지방을 조선통치에 있어서 문제 지역으로 인식하였다. 이 지방은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되어 타 지역에 비해 민도(民度)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서북지방 중에도 평북의 선천, 정주지방과 평양, 황해도의 안악지방은 일제의 소위 3대 관찰지구에 속했다. 이 지방에서는 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산업을 장려하는 것이 구국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곳마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이들은 ‘일면일교제’(一面一校制)를 주창하고 효과적인 교육운동을 위해 1909년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이 총회를 탄압할 구실을 찾았다.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얻으려 국내에 들어와 체포되자 이를 계기로 안명근을 비롯해 김구, 김홍량, 도인권 등 해서교육총회 관계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혹독하게 탄압하였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105인 사건
이 시기의 105인 사건 또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결사를 통해 민족 독립운동을 추진했는데, 대표적인 조직이 신민회(新民會)였다. 1907년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상동청년회의 전덕기, 이동녕, 이동휘, 양기탁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민족운동 단체였다. 이들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국민운동과 그 역량을 축적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런 정신에서 안창호는 1908년 평양에 대성(大成)학교를,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五山)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신민회의 중앙조직은 서울에 있었으나 지방 조직은 기독교세가 강했던 서북지역, 특히 평안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1910년경에는 회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총독부는 신민회를 기독교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 선교사가 있다고 보아 탄압을 의도하게 된 것이다. 즉 105인 사건은 한국기독교의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을 차단하기 위한 음모였다.
이 사건은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고등경찰과장 구니토모 쇼켄(國友尙謙) 등이 꾸민 사건으로서 1910년 12월 29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압록강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로 신의주로 갈 때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는 틈을 타서 그를 암살하려 했다고 조작한 것이다. 데라우치가 선교사 G S 메쿤(G S McCune)과 악수하는 것을 신호로 암살하려 했다고 조작하고 절대 다수의 관서지방 기독교 지도자 등 약 600명을 검거하였다. 이 중 125명이 1912년 5월 기소되었는데, 그중 93명이 기독교 지도자였다. 전덕기 목사를 비롯하여 6명의 목사와 50명의 장로, 80명의 집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세력과 민족운동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임이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던 전덕기 목사와 김근형(金根瀅), 정희순(鄭希淳)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폭력적이었다. 형을 선고받은 105인은 제2심에서는 99명이 무죄 석방되고, 주모자로 분류된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등 6명에게만 4년형이 언도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1915년 2월 석방되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시민 9000여명이 이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이승만, 안창호는 미국으로,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결과적으로 항일, 민족운동은 해외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한 북장로교선교부는 1908년 선교지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정책 혹은 불간섭주의를 지향하지만, 식민정부에 의한 비인간적인 처사에 대해서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런 입장은 더욱 심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상규(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