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쓰는 이야기 좀 들어보소”… 17인 창작론 묶은 ‘소설가로 산다는 것’
입력 2011-10-14 17:32
‘창작론’을 쓰는 일은 소설쓰기보다 어렵고 지겹다.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나에게 아무런 ‘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늘 희뿌옇고 몽롱해서, 저편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시간과 공간을 헤맨다. 단어와 단어들을 겨우 잇대어 가면서 그 희뿌연 시공을 기어서 건너가는 꼴이다.”(김훈) 소설가 김훈의 말이 아니더라도 글을 쓴다는 행위는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글 쓰는 인간(Homo Writers)’은 늘 두 갈래의 길 앞에서 초조하고 위태롭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극단으로 갈라지는 두 갈래길 앞에서 글 쓰는 인간은 분열한다. 그것은 강박과 신경증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작가란 희귀한 질병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김훈을 비롯해 우리 시대 작가 17인의 창작론을 묶은 ‘소설가로 산다는 것’(문학사상)은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은밀하고도 내밀한 고백들을 담고 있다.
“김애란은 언어란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질료라는 사실을, 어느 여름날 서울 안암동의 한 헌책방에서 구입한 양장본 ‘언어학사’를 매개로 해 실감나게 서술한다. 책갈피엔 황진구와 박선미라는 학생이 나란히 신청한 두 장의 수강신청서가 꽂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번갈아보며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이 분명 사귀는 사이였을 거라 확신해서였다.”(35쪽)
그러나 수강신청서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 김애란에게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황진구의 옛 하숙집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로부터 “진구? 나간 지 한참 됐지. 지금 여기 안 살아요”라는 말을 들은 김애란은 “옛날 옛날 안암동에 황진구와 박선미가 ‘언어학사’를 배우고 사랑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상념과 함께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박선미, 90학번, 무더위, 현대미술, 제기동, 전화번호를 통해 여기까지 왔다. 모든 게 난데없고 사소하다. 동시에 연결돼 있기도 하다.”(40쪽)
김인숙은 글 쓰는 행위를 퍼즐 맞추기에 비유한다. 그는 한때 5000 피스에 달하는 고난도 퍼즐에 빠져 식음도 전폐한 채 몰입한 적이 있는데 퍼즐을 맞추는 동안 눈은 피로하고 두통에 소화불량까지 걸릴 정도였다. 하지만 퍼즐 맞추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소설쓰기와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나이에 대체 뭐하는 짓인가 하는 환멸을 마지막 한 피스를 찾을 때까지 안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왜 하나? 그거 하는 동안은 ‘다음번의 한 피스’ 이외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 고통스럽거나 우울한 모든 생각들이 ‘다음 한 피스’로 대체된다.”(59쪽)
박민규는 너무 심심해 견딜 수 없을 때, 모든 게 시시해보이고 심드렁해질 때, 생각을 공 굴리고 또 공 굴리다가 마침내 중얼거리게 된다면서 이렇게 털어놓는다. “심심하다. 정말 할 일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일을 떠올리지 못한다. 나는 문득 소설을 떠올린다. 맞다 참. 그러고 보니 소설이란 게 있었지. 문든 그런 게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드는데, 그런 게 없어도 또 다행이겠냐고 나는 비로소 생각하는 것이다.”
그밖에 김경욱 김연수 김종광 심윤경 윤성희 윤영수 이혜경 전경린 한창훈 함정임 등이 들려주는 창작에 얽힌 이야기는 한 편 한 편 에세이를 읽듯 감칠맛을 자아낸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