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메이는 사랑-이별-침묵… 한영옥이 가을에 전해주는 시집 ‘다시 하얗게’
입력 2011-10-14 17:32
한영옥(61·사진) 시인은 신작 시집 ‘다시 하얗게’(천년의시작)의 서두에 독일작가 막스 피카르트(1888∼1965)의 작품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라앉히는, 침묵하는 실체의 힘에 의해서 많은 것들은 저절로 정돈된다.”
대립과 가라앉힘과 정돈이 이 시집에서 드러난 주제일 터인데 우선 표제작을 읽어본다.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가르며/ 기차 지나가는 소리, 영락없이/ 비 쏟는 소리 같았는데// 또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깔고/ 저벅대는 빗소리, 영락없이/ 기차 들어오는 소리 같았는데//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고// 뛰쳐나가 우두커니 섰던 정거장엔/ 얼굴 익힌 바람만 쏴하였습니다// 다시 하얗게 칠해지곤 하는 날들/ 맥없이 눈이 부시기도 하고/ 우물우물 밥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다시 하얗게’ 전문)
‘당신’으로 인해 가슴 먹먹해지며 애를 태웠던 젊은 날의 애린(愛隣)은 이순을 넘긴 시인의 가슴에서 차분하게 정돈된다. 흔히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고 말하듯, 잉걸불처럼 지글거리던 그리움은 까망과 하양이라는 대립 구조에 의해 상쇄되면서 시인은 이제 침묵의 세계에 들어있다. 침묵은 단순한 말의 포기 상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인 말의 정돈 상태이다. 존재와 존재, 말과 말 사이를 이어주는 묵언의 세계다.
“그 여자에게/ 한창 물오른 애인이 보내준/ 복숭아 수북수북 담긴 소쿠리가/ 복숭아가 뭔지도 모르는 마을에 쏟아졌네/ 사랑은 꼭꼭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여자 이 집 저 집 나풀거리며/ 복숭아 몇 알씩 골고루 나눠 돌렸네/ 온 이웃이 복숭아 단물에 흠씬 젖어/ 그날 하루 여자와 함께 아주 달았네/ (중략) 내년 이맘 때, 성큼 오지 않을 이맘 때에/ 그 여자 빈 소쿠리를 옆에 끼고서/ 들썩거리며 한없이 울게 된다네.”(‘그하루, 아주 달았네’ 부분)
복숭아가 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또 침묵에 젖는다. 이항대립의 이미지를 일상 언어로 담아낸 참 좋은 시집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