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통영의 딸’과 윤이상
입력 2011-10-13 17:52
북한에 갇혀있는 ‘통영의 딸’을 구출하려는 노력을 지켜보자면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피해갈 수 없다. 이 운동의 주역인 오길남 박사는 책에 “1985년 가족을 데리고 북한에 가도록 권유한 사람이 윤이상이었고, 1991년 탈출한 오 박사에게 북한으로 되돌아가도록 회유한 사람도 윤이상이었다”고 적었다.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세 모녀 사진도 윤이상이 회유를 위해 건넨 사진이라고 증언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통영의 딸’의 비극에 윤이상의 책임이 크다. 물론 근거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는 반론도 있다. 사정이 어떻든 난처해진 사람은 통영시민들이다. 통영은 그동안 윤이상을 고장이 낳은 불세출의 위인으로 여기고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해왔다. 생가 터에 지어진 테마파크 전시관에는 유품은 물론 북한에서 반입한 흉상까지 전시하고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의 단골 견학지다.
친북 행적 다시 도마에 올라
이는 윤이상의 고향 사랑에 대한 지역민의 화답이다. 생전에 그는 “내 음악의 모태는 통영의 바다, 갈매기 소리”라고 술회했다. 통영 사람들도 대부분 윤이상이 지은 노래 한 두 곡은 부를 줄 안다. 그 난해한 클래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통영에 있는 여러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기 때문이다. 북한 수용소의 신숙자씨도 통영초등과 통영여중을 나왔으니 윤이상의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을지 모른다.
이런 향토애가 정치적 행적을 덮을 수 있을까.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한국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그는 석방 후에도 자주 북한을 오가며 친북활동을 했다. 북한에서는 윤이상음악당을 짓고 그를 모델로 영화를 제작하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2000년에 나온 김일성 교시집 ‘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에는 “선생은 북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의 기만선전을 깨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기록돼 있다.
인터넷에서는 부인 이수자씨의 글도 자주 거론된다. 김일성 사망 5주기에 쓴 글은 이렇다. “위대하신 수령님,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없이 나라 다스리심을 보고 계실 것입니다.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령전에 큰 절을 올립니다.” 이에 앞서 김일성의 부음을 접한 윤이상 부부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이라고 추모했다. 윤이상은 이런 활동에 대해 특별한 해명이나 사과 없이 1995년 사망했다. 친일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한 서정주와 다른 부분이다.
‘통영의 딸’과 윤이상 사이에는 이렇듯 심연이 있다. 통영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지에게 전화를 넣어보니 “조심스러운 이야기”라며 대강 세 부류로 나뉜다고 전했다. 먼저 윤이상의 행적을 부각시키면 관광산업에 악영향을 준다고 꺼려하는 쪽, 통영의 딸을 파멸시킨 자가 통영의 대표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쪽, 과거를 따지기보다 일단 세 모녀를 구출하고 보자는 쪽이다.
진실 맞춰 새 위상 찾아야
통영에서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윤이상의 이름을 딴 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린다. 근 1억원의 상금이 걸린 이 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통영을 찾을 것이다. 이들에게 윤이상은 어떻게 비칠까. 이 즈음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고장의 얼굴로 받드는 것은 허상이나 우상을 모시는 것과 같다. 윤이상 개인으로서도 탁월한 음악적 성과가 정치의 그늘에 놓이는 것은 불운이다. 윤이상에 대한 새로운 위상의 모색. 이는 ‘통영의 딸’이 통영시민, 나아가 우리 국민에게 주는 숙제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