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청춘’ 김기덕 감독 부산영화제서 회고전 “나는 죽어서도 영화감독이다”
입력 2011-10-13 17:54
영화감독 김기덕. 누가 떠오르는가. 영화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쁜 남자’ ‘사마리아’ ‘아리랑’ 등을 연출한 작가주의 감독 김기덕(51)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1960년대 한국 대중·장르영화를 이끌었던 원로감독 김기덕(77)이 주인공이다. 1961년 ‘5인의 해병’으로 메가폰을 잡기 시작한 그는 청춘영화 전성시대를 연 ‘맨발의 청춘’(1964), 남북 이데올로기 문제를 건드린 ‘남과 북’(1965), 최초의 괴수영화인 ‘대괴수 용가리’(1967) 등 숱한 화제작을 연출한 최고 흥행감독이었다. 엄앵란-신성일 콤비 시대를 열어 준 것도 그였다. 43세 때 제작한 ‘영광의 9회말’(1977)을 끝으로 현장을 떠나 대학(서울예술대) 교수로 옮겼지만 그를 빼놓고는 우리 영화사를 쓸 수 없을 정도다.
올해로 제16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를 영화계 전면으로 다시 불러냈다. ‘김기덕, 60년대 한국 대중·장르영화의 최전선’이란 타이틀의 회고전을 통해 그의 대표작 8편을 상영했고, 한국영상자료원과 공동으로 같은 이름의 책도 펴냈다. 손바닥을 찍어 동판에 남기는 핸드프린팅 행사도 가졌다. 지난 7일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인 영화의 전당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회고전을 열게 된 소감은.
“70년대 말에 학계로 떠났기 때문에 나는 영화계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회고전을 열어 나와 내 영화들을 재조명해 주니 너무 감개무량하고 고맙다.”
-감독으로 17년 동안 일하며 만든 작품이 69편이나 된다. 1년에 평균 4편꼴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
“김수용 감독이나 임권택 감독 등 100편 넘게 연출한 감독도 있지만 나처럼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영화를 한 감독은 없을 거다.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다. ‘맨발의 청춘’은 크랭크 인(촬영 시작)해서 극장에 걸리기까지 고작 29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깡패하고 상류층 여자하고의 순정어린 사랑이라는 큰 줄기만 있었지 디테일(세부 내용)도 없이 촬영에 들어갔었다. 낮에는 찍고 밤에는 다음 날 찍을 거 각본 쓰고 하면서 만들었다. ‘흥행보증수표’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인기가 있어 추석 신정 구정 등의 대목에는 언제나 내 작품이 극장에 걸렸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
“작품마다 다 정성을 들인 거라 특정 작품을 거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쉬운 작품은 하나 있다. 1965년 만든 ‘남과 북’이다. 당시는 남북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는 게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검열에서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다 삭제됐다. 검열에 저항하고 싸웠어야 했는데 나는 타협하고 말았다. 결말 부분이 다 잘려 ‘남과 북’이란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가 됐는데, 지금 생각해도 천추의 한이다.”
-다룬 장르도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도 많이 한 감독으로 평가되는데(그는 호스티스를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 ‘칠십칠번 미스 김’, 최초의 야구영화 ‘사나이의 눈물’ 등 새로운 소재의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당시 한국 영화는 소재가 빈곤했다. 여자의 고통스러운 일생을 다룬 ‘최루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외래문명이 급격하게 쏟아져 들어오던 엄청난 변혁기였다. 관객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소재를 계속해서 찾아야 했다.”
-영화 제작 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 달라.
“‘5인의 해병’을 촬영할 때 정말 실탄을 사용했다. 신영균 최무룡 등 주연배우들을 뛰게 하고 특등 사수들에게 뒤에서 실제 사격을 하게 했다. 특수효과 기술이 떨어질 때여서 실감나는 장면을 얻으려고 그렇게 했다.”
-최고 흥행감독이었지만 상복은 별로였다. 서운하지 않았나(그는 최고 흥행감독이었지만 상은 ‘5인의 해병’으로 받은 대종상 신인감독상이 유일하다).
“영화는 비용이 많이 드는 분야이기 때문에 흥행성이 중요하다고 봤다. 작가주의에 빠져 자기만족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추구했다. 나는 상을 못 받았지만 제자들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고 있어 그걸로 대리만족하고 있다.”
-요즘 한국 영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우리가 활동하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정말 잘 만든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투자자들의 요구가 작품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의 요구를 자꾸 반영하다 보니 주제에서 벗어나 지엽적인 것에 덧칠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
-제작 현장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명함에는 여전히 영화감독이라고 적혀 있다.
“영화를 통해 나는 교수가 됐고, 대학 학장도 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도 됐다. 나의 뿌리는 영화이고, 나는 죽어서도 영화감독이다.”
라동철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