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년] (6) 中 산둥성 선교사 3인 결실
입력 2011-10-13 17:44
‘고난의 행군’ 끝에 라이양 성내에 교회 세우다
취재팀이 찾은 산둥(山東)성 라이양(萊陽)은 칭다오(靑島)에서 120㎞, 옌타이(煙臺)에서 110㎞ 떨어져 있는 곳이다. 중국 내 여느 소도시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길거리는 번잡했다. 1919년 자료를 보면 라이양은 높은 성곽으로 둘러있고 거주민이 100만명에 달했다. 특히 이곳에서는 청나라 조정과 서구 열강에 맞서 매우 강력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었다. 그중 하나가 1910년 산둥판 신해혁명의 서막이 된 농민봉기인 납세거부운동(항연항세·抗捐抗稅)이었다. 그 결과 복음 전파가 여의치 않게 됐다. 라이양인들은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간주하고 선교사들의 전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문맹률까지 높다 보니 선교사들이 설령 전도했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게 용이치 않았다. 이 때문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선교사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사역을 해야만 했다.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한 3명의 선교사
중국어라는 장벽은 매우 높았다. 박 선교사는 자신이 중국어 발음을 모르기 때문에 “글자를 아는 무식자와 같다”고 고백했다. 1917년 산둥 선교사로 라이양에 파송된 홍승한(洪承漢) 목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세상에 학(學)키 용이한 문자는 별무(別無·없으되)하되 중국 한문자란 것은 자수(字數, 글자의 수효)의 번다(繁多, 번거롭게 많음)와 자의(字義, 뜻)의 변동과 성음(聲音)의 분별이 천태만상이라 학키 심난(甚難, 매우 어렵다)하여 10년 이상을 학습해야 서책을 간투(看透·알아차리고)하고 장구(章句, 문장의 단락)를 제작하는 고로 부가자제(富家子弟, 부잣집 자손)나 능히 입학하고 빈가자제(貧家子弟, 가난한집 자손)는 능히 배우지 못함으로….”(1920년 7월 20일 발행 ‘신학지남’ 제3권 제2호)
선교사 사모들은 더 힘들었다. 가사노동과 자녀양육 등으로 중국어를 제대로 익힐 수 없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커 심지어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파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 자녀교육, 의료 문제 등에 대해 어떤 대책도 없었다. 당시 라이양에는 의사가 한 명도 없어 질병에 걸리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선교사들이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명의 선교사는 이 같은 난관에도 굴하지 않았다. 라이양 부근 각 촌에 있던 교인 5∼6인을 모아 마침내 성내에 교회를 세우게 됐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전도와 교회개척을 목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자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따라서 이들 선교사는 목회 훈련 및 신학공부를 통해 목사선교사로서의 준비가 잘 갖춰져 있었다. 그러기에 선교지 부임과 함께 중국어를 익히며 문서를 통해 전도했다. 그 결과 1915년 가을과 겨울에 5∼6명의 신입교인을 얻어 전체 교인이 40여명에 달했다. 평균 집회 참석자는 30여명. 1915년에는 중국인 3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과거의 나쁜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선한 증거를 보인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라이양시기독교회’를 찾아가다
취재팀은 백방으로 라이양 시내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 터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시내에서는 중국 정부가 공인한 ‘라이양시기독교회’를 찾는 데 만족해야 했다. 라이양시 정부로부터 남서쪽 1㎞ 떨어진 곳, 오토바이를 파는 골목길 내 한 건물 위에 교회가 있었다. 이곳이 교회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은 입구에 세워진 조그만 문패와 십자가 표시가 전부였다. 교회는 외부에서 볼 때는 규모가 작은 줄 알았는데 정작 내부로 들어가 보니 2∼4층을 모두 쓰고 있었다. 한 번에 1500여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도 마련돼 있었다.
이 교회 리더들에 따르면 매주일 1000여명의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담임목사는 따로 없다. 교인들은 “평신도 리더들이 돌아가면서 매주일 설교를 하고 세례식을 거행할 때는 옌타이에서 목회자가 와 집례를 한다”고 전했다. 현재 교인들 가운데 초기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동역했던 당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세월이 많이 흘러 대부분이 하나님 나라에 갔기 때문이다. 다만 산둥성의 마지막 한국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에 대해선 이야기를 들었다며 방 목사를 꼭 만나보고 싶다는 교인들은 더러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초기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왔다고 하자 우리를 환대해주었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지 않다는 걸 느꼈다. 라이양시기독교회를 나서자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렌터카로 이동하는 중 길가 후미진 곳에서 ‘기독교당(基督敎堂)’이라고 써있는 문패가 눈에 들어왔다. 라이양시기독교회의 옛 모습이었다. 현지 안내인은 “교회를 새롭게 마련하기 전까지 예배를 드렸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3명의 선교사가 사역한 그 교회는 아니었지만 김영훈 선교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도하는 방법과 교회를 처리하는 것을 개량하여 다 진리대로 행하고 주일강론회와 수요일 기도회를 설립한 일과….” 선교사들은 고국에서 하듯이 선교활동을 해나갔다.
1915년 성탄절에는 라이양 교회 성도 30명이 인근 교도소를 찾아가 죄수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당시 라이양 교회는 완전한 조직교회가 아니었다. 전도실의 기능을 가진 미조직 교회로 ‘복음당(福音堂)’이라고 불렸다. 1916년 가을경의 교세를 보면 세례인 12명, 원입인 30명, 집회 참석 인원 40여명에 매주일 헌금이 80∼90전. 1년 주일헌금 총계는 50원이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이 헌금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중국교회가 자급해 나가야만 자립할 수 있다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외국 자본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 재정을 보조하는 건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지 못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조선에서 활동했던 찰스 알렌 클락(郭安連) 선교사는 당시의 중국 교인들의 연보정신에 대해 이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선교사가 말을 통해 전도하기 시작하자 중국 교인은 연보에 대한 정신이 도무하기 때문에 교회에 돈 드는 일은 전부 의뢰하는 것뿐이었고….”(곽안련, ‘장로교회사전휘집’)
선교사 자녀교육, 안식년 제도 등을 고려치 않은 한국교회
지금도 선교사 자녀교육 문제로 인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려움이 겪고 있듯이 초기 선교사 역시 그러했다. 한 서양선교사의 언급을 통해 당시 선교사 자녀교육 문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동료 선교사의 자녀들이 거리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저속한 말을 배워도 별다른 교육 방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선교사 자녀교육에 대해선 대책이 없었다. 1915년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선교사 자녀교육 문제가 언급됐지만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월 선교사 자녀교육비 항목을 두고 비용을 지출한 것이다.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의한 1912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 총회나 1913년 선교사 파송 이후 각종 회의에서 선교사 파송 규칙이나 규정이 문서화되지 않았다. 선교사 안식년 규정 또한 마련돼 있지 않았다. 훗날 2명의 선교사가 총회 전도국의 허락도 없이 사역지를 이탈한 지 1년이 지나도 선교사 안식년 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안식년 규칙이 마련된 것은 1918년이었다.
라이양=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 사진 서영희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