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 주먹, 열무를 다듬다… 박종팔 복싱 미들급 前세계챔피언 ‘인생 3라운드’

입력 2011-10-13 18:16


선선한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11일 경기도 남양주의 수락산 자락 한 식당.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 같은 1970∼80년대 옛 노래가 흘러나오는 한 식당에 단단한 검은색 SUV가 들어온다. 차에서 내리는 남자도 단단하고 강인해 보인다. 날 선 수컷의 냄새가 확 풍긴다.

그런데 남자가 단단한 SUV 트렁크에서 꺼내드는 건 열무와 배추다. “아 싱싱하다”면서 채소를 부지런히 나르고선 한 구석에 앉아 열무를 다듬는다.

이 남자의 이름은 박종팔(53). 한때 동양의 호랑이, 황소 주먹, 무적의 거포로 불렸던 권투계의 전설, 바로 그 사람이다. 옛 챔피언은 요즘 개량한복 차림으로 마당을 쓸고, 열무를 다듬고, 꽃에 물을 준다. 챔피언의 인생 3라운드 이야기다.

인생 정점 1라운드, 끝 모를 파멸 2라운드

왕년엔 어마어마했다. 박종팔의 옛 기록을 쓰는 이유는 그를 모르는 세대에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 증명하기 위해서다. 박종팔을 안다면, 아는 이야기 왜 쓰냐고 질책 마시고 복싱 황금시대, 짜릿한 KO승의 순간을 떠올려 주시길. 복싱계에서 박종팔의 위치는 야구로 따지자면 선동열, 최동원 급이요, 축구로 치면 홍명보, 황선홍 클래스다. 현재 국내 권투의 스타 명맥이 끊긴 탓에 현재 선수 중 그와 비교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1977년 신인왕전을 통해 정식 권투선수가 됐고 83년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이듬해 국제복싱연맹(IBF) 슈퍼미들급 챔피언, 87년에 세계복싱협회(WBA) 슈퍼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당대 동급 세계 최강의 복서였고 지금도 역대 슈퍼미들급 선수 중 최고로 손꼽힌다.

복싱 황금기였던 80년대엔 장정구, 유명우 등 국내엔 쟁쟁한 선수가 많았는데 대부분 경량급이었다. 하지만 박종팔은 세계무대를 호령한 중량급이었다. 17개 프로복싱 체급 중 박종팔의 슈퍼미들급(76.2㎏ 이하) 위에는 3개 체급뿐이다. 박종팔처럼 중량급을 지배한 동양인은 거의 없다. 그는 86년 미국에서 벌어진 타이틀 방어전에서 이겼는데, 이는 한국인이 미국 원정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게다가 계속되는 KO 퍼레이드. 전적 46승 5패. 이중 39승이 KO승이었다. 주먹 한 방에 상대방은 링 위에 쓰러졌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상대에 대한 비디오 분석도 없이 링에 오르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게으른 천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밤마다 옥상에서 수건에 추를 달아놓고 스텝을 밟으며 섀도복싱(보이지 않는 상대를 가정하고 혼자서 공격과 수비 동작을 익히는 것)을 연마했던 노력파였다.

최고의 선수에게 돈은 저절로 따라왔다. 파이트머니는 IBF 시절 기본이 5000만원이었고, 미국 원정에선 15만 달러를 받았다. 논타이틀전에서도 10만 달러를 받았다. 1000만원이면 좋은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번 돈은 집과 땅 사는데 썼고 착실히 모아 젊은 나이에 갑부가 됐다. 국세청은 그를 부동산 투기꾼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높이 올랐던 만큼 추락의 골도 깊었다. 1994년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하면서부터 굴욕으로 점철된 인생 2라운드가 시작됐다. 당시 큰 경기를 유치했는데 동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경기는 취소됐다. 돈을 날렸고 37일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강남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등 재기를 노렸는데 불행히도 주변엔 그를 이용하려는 이들뿐이었다. 돈 빌려 달라는 이는 많았지만 갚은 이는 없었다. 믿으면 배신당하고, 그래도 믿었다가 또 뒤통수 맞는 일이 반복됐고 결국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링에서는 거칠 것 없던 야수였지만, 링 밖에선 사기꾼들의 쉬운 사냥감에 불과했다.

“갈 곳 없고, 손 벌릴 곳도 없고. 남들이 알아보는 것도 무섭고.” 떨어져 죽으려고 봐둔 자리가 5군데나 됐다.

3라운드, 수락산 산사나이가 되다

2008년 현재의 아내 이정희(53)씨를 만나면서 인생이 좀 펴나 했다. 사업가였던 아내는 남편의 재기를 위해 빚을 갚아줬고, 새로운 사업도 시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그래서 박종팔은 건설업체 부회장, 청소용역업체 대표 등의 명함을 새로 얻을 수 있었지만, 이것들이 새로운 인생이 되어주진 못했다. 사업은 꼬였고, 건강은 점차 나빠졌다. 계속된 배신으로 인한 화병. 게다가 당뇨와 뇌졸중 증세도 나타났다. “몸이 안 좋으니까 땀을 조금만 흘려도 온 몸에서 썩은 내가 나서 사람이 다가오질 못할 정도였다.”

“이 사람을 소개해준 사람이 (남편 박종팔이) 예전에 잘나갔고, 지금도 먹고 살기에는 어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웬걸 보니까 은행 3곳에서 신용불량자에다 천지 깔린 게 빚이더라고요. 사기결혼 한거죠.” 아내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회상이다.

수락산에 터를 잡은 건 지난해 8월이다. 한 지인이 건강도 나쁘고 하니 수락산 기슭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 가서 살라고 권했던 것. 막상 가보니 거대한 쓰레기장이었다. 박종팔은 하루 종일 쓰레기를 치우고 또 치웠다. “15t 트럭 18대가 쓰레기를 실어 날랐다니까.”

쓰레기장은 등산객을 위한 식당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11월 시험삼아 문을 열었다가 올 3월 정식으로 개업했다. 메뉴는 닭볶음탕과 칼국수, 부침개 등 하산객들을 유혹하는 메뉴 중심으로 구성됐다. 식탁도 직접 만들었고, 식당에서 힘쓰는 일은 거의 다 직접 했다. 정원을 꾸미고 가꾸는 것도 그의 일이다.

“여기 안 왔으면 오전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겠지.” 밤도깨비 타입인 그는 늦게까지 TV 보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해왔지만 산에선 달라졌다. 깨끗한 산 공기와 규칙적인 생활, 적절한 강도의 노동은 박종팔의 근육을 팽팽하게 만들고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95㎏이었던 몸무게는 85㎏ 정도로 줄었고, 운동선수 특유의 건강한 몸매가 되살아났다. “때깔이 돌아온거지. 작년만 해도 안 이랬어.” 옷 갈아입는다고 웃통을 벗는데 쉰을 넘어선 사람의 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최근 머리까지 짧게 자르면서 챔피언의 면모가 되살아났다.

박종팔과 아내는 식당에 붙은 20㎡(약 6평)짜리 조립식 집에서 지낸다. 서울에 집이 있지만 1주일에 한두 번 다녀오는 정도다. 한겨울이 되면 산을 내려가겠지만 그 전까지는 머물 계획이라고 한다.

일상은 단출하다. 6시 정도면 눈을 뜬다. 부지런히 마당을 쓸고 꽃에 물을 준다. 식당 일 중 요리 외의 것들은 대부분 그의 몫이다. 여유가 있으면 기르는 개 ‘금팔이’와 함께 산을 오른다. 등산객들과 얘기하고 지인들과 노는 것도 그의 일상이다. 그를 알아봐주는 모든 등산객이 그의 친구다. 박종팔이 밖에 앉아 있거나 일을 하면 다들 와서 인사를 건네고, 그도 친절하게 응대한다. 그를 찾아왔다가 기자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되돌아간 이웃들도 꽤 됐다.

마음을 비우고 행복을 얻다

그의 식당 마당엔 직접 만든 사각 링이 있다. 왜 만들었습니까? “후배 양성을 위해서지. 일반 사람들도 쓰고 싶음 써도 돼.” 때마침 등산객 일행이 우르르 내려가다 링을 보고선 “우리 스파링 한번 하자”며 다가오자 “허허 좋지요. 심판 봐드리리다” 한다.

주말에는 인근 체육관에서 선수들이 훈련하러 온다. 매일 그를 찾아오는 고등학생이 한 명 있는데 한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좀 하는 거 같아. 내년부터는 시합에 내보내려고.” 권투를 향한 챔피언의 애정은 여전히 뜨겁다.

다만 국내 권투계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다. “하나로 뭉쳐도 쉽지 않은 판국에 파벌싸움을 하니까. 그래서 사무 쪽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쇠락해 버린 국내 복싱판을 언급하는 그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지금처럼 사는 것이 행복해요? “지금 수락산에 사는 게, 남들은 왜 그러고 사느냐고 하지만, 나는 일생에서 가장 사람답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 1라운드는 ‘성공과 영광’, 2라운드는 ‘실패와 좌절’이었다면 3라운드는 행복이다. “남들은 예전 챔피언 때가 가장 화려했다고 생각할거야. 그땐 모든 것을 다 가졌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행복해. 가족 등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다고 할까, 사는 맛을 느껴.” 20대 후반인 딸은 지난해에야 처음으로 가족들끼리 모여 생일파티를 하고 생일케이크 촛불을 꺼봤단다. “잘나갈 때는 가족도 몰랐어.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다인줄 알았지.”

3라운드 인생을 함께하는 아내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다. 아내가 어떻게 좋은지 표현해 달라니까 처음엔 다른 말을 하며 어물쩍 넘어간다. 그러다가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이 부인과 같이 다니면 ‘그놈 참 못났다’ 했어. 세상을 잘못 산거지. 요새는 어딜 가도 같이 가자고 해.” 수줍게 말한다. “요샌 뭘 하든 항상 아내와 상의를 해. 마당을 쓸어야 하나 마나 이런 것도 결재 받고.” 실없는 농담에 곁에 있던 아내가 챔피언을 한 대 툭 친다.

“인생이 욕심 부려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링 밖에선 주먹으로 되는 게 없다는 것도.” 뭐가 행복하냐는 질문에 “산에 있다 보니까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다. 팬들과 얘기하는 것도 즐겁고. 이런 건 돈 주고도 못 산다. 행복한 생활이지.” 한다. 또 뭐든 하나씩 가꿔나가는 보람도 있다고 했다.

산 속에 살면서부터 그에게 돈 빌려 달라고 하는 지인들, 그를 이용해 보려는 지인들은 줄었다. 대신 나누며 사는 지인은 늘었다. 주변 농장을 운영하는 아는 동생들한테서 열무, 배추 등 이것 저것 많이 얻어온다. 맛있는 거 먹으러 오라는 초대도 많다. 이들과 교류하면서 챔피언은 마음을 더 비운다.

챔피언은 인터뷰 도중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고 마실 것을 내놓았다. 챔피언이 타준 인스턴트 커피가 무척 달콤했다.

남양주=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