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갑의 먹줄꼭지] 사과와 대학

입력 2011-10-13 18:17


또 입시철이다. 요즘은 여름부터 수시 모집을 시작해 전체 기간이 늘어나면서 예전보다 집중도는 조금 떨어진 것 같지만, ‘긴장의 총량(?)’은 여전히 엄청나다.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수능시험 날에는 온 나라가 비상동원체제에 들어간다.

동원의 규모와 강도에 있어서 그날은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선거 날이나, 이제는 있는지 없는지 가물가물한 민방위훈련 날을 훨씬 앞지른다. 몇 년 전에 출간된 한국의 교육에 관한 책 한 권은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한다.

“1999년 11월 17일, 팽팽한 긴장감이 온 나라를 숨죽이게 하고 있었다”가 첫 문장이다. 내용을 모르는 채 읽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살인 장면이 나오는 추리소설이나 우주인의 침공이 임박한 장면이 나오는 공상과학소설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 ‘Education Fever’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교육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학생들이 자살하고 ‘입시전쟁’, ‘입시지옥’이란 말들이 전혀 낯설지 않게 들리는 우리의 현실을 그려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신문 상에서 이 말을 쓸 때는 보통 그 앞에 ‘과잉’, ‘지나친’, ‘비뚤어진’과 같은 수식어를 단다. 그렇다면 아예 『교육열병(熱病)』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다.

이 열병 때문에 생기는 여러 가지 증상이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그 열병을 유지시키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대학입시라는 무대다. 이 무대에는 여러 배우가 등장한다. 제대로 된 각본이라면 주연은 학생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질적인 주연은 학부모, 특히 어머니다. 우리의 교육열은 구체적으로 엄마의 아들·딸에 대한 교육열이다. 그 다음쯤에 나타나는 것이 삼각구도의 다른 꼭짓점인 학교와 학원이다. 공교육과 사교육으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학부모에게 그들은 대체재(代替財)이자 보완재(補完財)이고, 학생에게도 이 구분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 ‘학부모-학생-학교·학원’의 삼각구도가 우리의 교육, 우리의 입시를 움직이는 틀이다. 학부모라는 생산주체가 학교·학원이라는 생산설비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생산품이 학생인 탄탄한 고리의 틀이다.

이 틀 안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상징적 가치를 정의하고 실질적 기회를 분배하는 대학입시라는 기제는 점수에 맞춰 학생은 학생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줄을 서게 한 다음, 그 순서대로 짝을 지우는 이상한 게임이 되고 만다.

교육열병의 병인(病因)이 크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깊이 뿌리가 닿아 있어서 단기간에 근본적인 완치는 어렵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선 열이라도 내리도록 해야 할 텐데, 그 방법은 어떤 걸까? 그중 하나는 그동안 피동적이기만 했던 학생과 대학을 다시 무대의 전면으로 끌어내는 것이지 싶다. 지금의 점수에 의한 ‘줄서기=짝짓기’ 구조가 아니라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맞는 대학을 골라 지원하고, 대학은 그 대학이 원하는, 그 대학에 어울리는 학생을 골라 받아들이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작년에만도 70만명이 넘는 학생이 수능에 지원했었다. 이 줄 말고는 없다고 잔뜩 겁을 주어서 그 많은 젊은이를 한 줄로 세우는 것과, 여기도 줄이 있지만 저기도 줄이 있고, 또 저것도 줄이라고 알려주고 그들을 풀어놓는 것,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운가? 이런 새 틀을 짜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그동안 눌러 놓았던 ‘서로 다름’에 대한 인식 혹은 강조이다.

학생이 원하는 대학이나, 대학이 원하는 학생에 다양성이 생기게 해야 한다. 점수 말고는 서로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학생과 대학이 아니라, 모양과 크기도 다르고, 색깔과 맛도 다른 학생과 대학이 나올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점수로 이들을 줄 세울 수는 없다. 꼭 줄을 세우겠다면 하나가 아니라 여러 줄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입시에 관한 논의에서 말단의 단역(端役)으로 밀려나 있던 대학도 번호표 들고 줄서서 배급순서를 기다리기만 하던 종래의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A대학과 B대학을 가르는 것이 번호표에 적힌 숫자뿐이라면, A대학을 ‘A’대학으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없다.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교육은 어떤 것인지, 어떤 학생이 거기에 맞는지를 생각하고, 주장하고, 실천하는 대학이 나와야 한다.

‘국광’ 전문점, ‘후지’ 전문점, 이런 식으로 한 가지 품종의 사과만을 파는 과일가게를 상상해 보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국의 모든 과일가게가 국광 하나만을 판다면, 그래서 배도 살 수 없고, 귤도 먹을 수 없고, 다른 사과 품종도 구경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선택의 여지라고는 그 한 가지 품종 안에서 최상품과 중품을 가르고, 가격을 다르게 매기는 것만 남는다. 비유가 지나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의 입시구조 안에서는 학생이나 대학이나 그 사과와 다를 바 없다. 나는 배도 좋아하고, 귤도 먹고 싶다. 알레르기 때문에 나는 못 먹지만 딸아이가 좋아하는 잘 익은 복숭아도 보고 싶다.

1등 학생도 여럿을 만들고, 1등 대학도 여럿을 만들자. 해마다 70만이나 되는 수험생이 쏟아붓는 노력과 그 숫자만큼의 가족이 들인 정성, 거기에 투자된 제도적, 물질적 자원의 엄청난 양을 생각하면 그걸로 1등 하나만 만들기는 아깝지 않은가? 더 만들자. 열을 내릴 수 있을 거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