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겉과 속-(9) 이탈리아·일본에서 배운다] 伊 “정당 국고 보조금 50% 삭감하라” 연일 시위

입력 2011-10-12 22:19


이탈리아는 특정 기업과 정치인·정당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뿌리 깊은 정치 관행을 갖고 있다. 정치인들은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그 대가로 해당 기업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식의 부정적인 유착관계가 지속돼 왔다. 몇 차례 정치자금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조치가 이뤄졌지만 검은 뒷거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정치권의 타협으로 이뤄진 개혁 조치들이 정경유착 관행의 뿌리를 뽑기에는 미흡했기 때문이다.

◇정당 국고 보조를 감축하라=정치자금 제도를 둘러싼 이탈리아 정치권의 최근 화두는 정당에 지급하는 국고 보조금의 감축이다. 국고 보조금 총액은 연간 1억8500만 유로(한화 약 2960억원)에 달한다. 로마 중심가에 위치한 이탈리아 하원 앞에는 거의 매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돌아가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구호는 “국고 보조금을 절반으로!”다. 매년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 보조금을 50% 삭감하라는 요구다. 시민단체만의 목소리는 아니다. 국고 보조금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은 다수 유권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선거비용만 봐도 그렇다. 규정은 최소득표율 1% 이상을 득표한 후보자에 대해 선거비용만큼 당에 보조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급되는 비용은 실제 지출액보다 훨씬 더 많다. 피렌체 대학의 파치니(Maria Chiara Pacini) 교수는 “이탈리아에선 실제 선거에서 지출한 비용과 국고에서 보조해주는 금액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며 “정당이 선거에서 100을 썼다면 그 비용의 2배, 3배를 보전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하원의 정당지원금 담당 펠렐라(Gaetano Pelella) 국장은 “단순히 선거비용 보전이 아니라 정당 전체 운영을 생각해서 넉넉하게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경제위기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세수로 너무 많은 국고 보조를 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정치권 내부에서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펠렐라 국장은 “현행 제도는 유권자당 0.9유로의 선거자금이 전체 정당에 나눠 지급되고 있지만 다음 선거부터는 유권자당 0.8유로만 지급하는 안이 논의되고 있다”며 “전체 보조비용이 10% 정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인과 유권자의 줄다리기=이탈리아 정치자금 제도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권과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시민들 간의 힘겨루기를 통해 변화돼 왔다. 정치권은 오랫동안 공기업과의 유착관계를 지속해왔으나 1974년 정당관련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제도적 규제가 시작됐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석유 가격 통제와 비축정책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관련 기업들의 검은 뒷거래가 드러났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제도 개혁에 대한 욕구를 표출했다. 그 결과물이 정당관련법 제정이었다. 정당관련법은 공기업의 정당 기부를 불법화하고 국고 보조를 통해 정당자금의 투명성을 보장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정치 관행의 힘은 법을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했다. 불법으로 명시됐지만 공기업의 정당 기부는 뒷거래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일부 정치인은 심지어 ‘마피아’로 대표되는 범죄 조직과도 연결돼 있었다. 1990년대 초의 ‘탄젠토폴리’(Tangentopoli·뇌물 공화국) 스캔들이 대표적이다.

스캔들 이후 이탈리아에선 다시 한 번 전면적인 개혁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권에서부터 비롯된 선거법 개정 국민투표 운동과 밀라노 검사들의 정풍운동인 이른바 ‘마니풀리테’(Manipulite·깨끗한 손)가 본격화되면서 국민들이 호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의 결과물로 이뤄진 1993년의 선거법 개정은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민들이 후보자를 직접 검증하고 선출한다는 취지로 기존의 순수비례대표제가 대부분 폐지되고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자가 당선되는 다수대표제를 근간으로 하는 선거제도가 도입됐다.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했던 기민당과 사회당이 몰락했고, 자금을 유용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스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급감했다.

선거법 개정은 정치자금 제도 역시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정당에 대한 국고 보조는 국민투표를 통해 폐지됐다. 국고 보조는 선거비용에 한정해 후보자에게 지급하는 방향으로 변화됐다. 하지만 획기적으로 변화된 제도가 기대만큼의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여전히 청탁의 대가로 암암리에 기부금이 제공되고 있고, 규정보다 2∼3배 많은 보조금이 지급되는 등 제도 운용의 허점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치자금 제도는 또 한 번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로마=탐사기획팀 indepth@kmib.co.kr

정승훈 차장 shjung@kmib.co.kr 김지방 차장 fattykim@kmib.co.kr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