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의 불안한 삶, 시인 윤동주의 ‘유작 미스터리’… 소설가 구효서의 신작 장편 ‘동주’
입력 2011-10-11 18:00
구효서(53)의 신작 장편 ‘동주’(자음과모음)는 비운의 시인 윤동주(1917∼1945)에 대해 쓰고 있다. 하지만 윤동주는 소설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話者)는 올해 스물일곱 살인 재일한국인 3세 김경식과 요코라는 여인이다.
“히라누마. 이름 동주. 쪼다같이 그 먼 도시샤 대학을 묵묵히 걸어다녔다. 뻔했다. 그의 사촌 소무라 무게이(宋寸夢奎)가 아파트를 소개했을 게. 동주는 도쿄 릿교대학을 잠깐 다니다 왔다고 했다. 동주와 무게이는 저 만주 땅,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외사촌간이라고 들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파트 입주자 신상철(身上綴)을 슬금슬금 훔쳐보았다.”(26쪽)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재학 중일 때 그를 지켜보았다는 열다섯 살 소녀 요코가 쓴 기록의 일부이다. 소설은 열다섯 살 요코의 기록과 그녀가 중년이 돼 자신의 모족어인 북해도 아이누어로 쓴 회상기가 중심부를 이루는데, 이 기록들을 현재 시점에서 발굴해 탐독해 나가는 화자 김경식의 진술이 소설의 또 다른 요체가 되고 있다.
일본인인 줄 알고 살아가던 김경식도 자신이 한국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국어를 익힌다. 그런 까닭에 요코는 언어적으로 일본어와 아이누어 사이에 존재한다. 김경식 역시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존재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코와 김경식의 진술은 일본어가 아니라 그들의 모족어인 아이누어와 한국어로 쓰인다.
윤동주 역시 만주 간도(間島)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간도는 ‘사이의 섬’이라는 뜻이다. 동주의 운명 역시 여러 나라의 영향력이 충돌하던 간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여러 세계의 ‘사이’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늘 불안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사이의 세계’를 바라보며 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특정한 가치와 이념, 국가와 민족공동체에 치우치지 않았다. 조선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모어인 조선어로 시를 썼을 뿐이다.
요코 회상기에 진술된 윤동주의 유고를 추적하던 김경식은 마침내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아이누 민속자료관에 보관된 요코의 유품에서 유고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고가 아니라 요코가 일본어에서 아이누어로 재번역한 시의 잔해였을 뿐이다.
“나는 당초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주의 유고가 원본 아닌 번역본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유고를 찾아나서게 했다. 특고의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번역한 시. 그런 거라면 동주의 시가 아니며 그의 시여도 안 된다는 게 나름의 신념이었고, 그것이 유고 추적의 계기였다.”(317쪽)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 윤동주는 일경으로부터 사상을 검증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강압 받는 그 순간에 이미 시인의 삶을 끝맺는다. 구효서는 요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시와 함께 죽었다. 그랬으므로 죽음 이후의 시, 강제 번역된 시는 시가 아니며 더구나 그의 시일 수 없다. 그가 영원한 시인으로 우리 곁에 살아남으려면 시와 함께 죽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본 없는 강제 번역 원고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398쪽)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