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후지모토 도시카즈] 내가 반말을 못쓰는 까닭

입력 2011-10-10 17:40


“언어에는 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어. 게다가 존댓말 써서 뺨 맞을 일 없으니…”

한국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학생과 함께 회기역 근처에 있는 파전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실 기회도 종종 있다. 20대의 젊은 학생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내는 시간만큼 즐거운 시간도 없다. 그런데 큰 고민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반말을 제대로 못 쓴다는 것이다. 학생한테 술을 권하면서 “한잔 하세요” “더 드세요”라고 하면 학생들이 불편하니까 말을 낮춰 달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쓰려고 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왜 이럴까?

그 이유의 하나는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일본사람이 한국말로 이야기할 때 ‘나는’이라고 하는 것보다 ‘저는’이라고 하는 것이 듣기 좋다고 하셨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들로부터 ‘나는’ ‘너는’ 하는 말을 듣기 거북해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이라는 말을 못 쓰게 됐다. 사실은 이 칼럼의 제목도 ‘내가’가 아니라 ‘제가’라고 쓰고 싶을 정도다.

한·일관계를 떠나서 생각해 봐도 외국사람이 반말을 쓰는 것에 익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말에도 한국말처럼 반말이 있는데 외국사람이 반말을 쓰면 나도 왠지 마음에 걸린다. 국제화 시대, 다문화 시대인데도 말이다. 왜 이럴까? 언어에는 민족의 혼이 깃들어 있다. 외국사람이 함부로 자기 말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가 우리의 어딘가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외국사람한테서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잠재의식도 있을지 모르겠다.

30년 전에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을 때 은사님께서 늘 “존댓말 써서 뺨을 맞습니까?”라고 하셨다. 어색해도 나는 앞으로도 말할 때 ‘저는’을 계속 쓸 것이다.

내가 학생에게 반말을 못 하는 큰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반말을 쓸 자격이 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경희대에서 맡고 있는 스피치와 프레젠테이션 수업은 학생들에게 발표시키는 수업이다. 여기서 늘 강조하는 것은 스피치도, 프리젠테이션도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것이다. 좋은 발표를 하려면 늘 호기심을 가지며 안테나를 곤두세우라고 하고 자유롭게 발표시킨다.

어떤 학생은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소개하면서 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어떤 학생은 스펙 위주의 생활이 아니라 젊을 때 여러 방면에서 도전하자고 호소하기도 한다. 아르바이트 체험을 이야기하는 학생도 많다. 어학연수, 해외여행 등 해외체험을 이야기하기도, 자원봉사 등 사회활동에 참여한 학생도 많다. 화제는 실로 다양하고 지금 한국 대학생들의 꿈과 관심, 고민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스펙이라는 말은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는데 심각한 취업난에 시달리고, 비싼 등록금에 허덕이면서도 학생들은 밝은 내일을 꿈꾸며 실로 착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다.

나는 반말은 그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게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배로서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의 고민과 아픔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다. 반말 쓰는 것이 망설여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내가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님의 수필인데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갈채라면 나도 누구 못지않게 할 수 있다. 인생의 선배로서 응원가도 노래해 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학생들과 반말로 이야기를 나눌 자격이 조금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직접 만든 수제 고로케다. 얼마 있으면 열리는 학생들과의 친목회에는 고로케를 많이 만들어 가져갈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나도 어색하게나마 반말을 써볼까 한다. “맛 있지? 많이 먹어!”

후지모토 도시카즈(경희대 초빙교수·전 NHK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