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독일의 스승 필립 멜랑히톤 (上)

입력 2011-10-10 21:04


21살에 교수 된 천재, 날카로운 글로 루터의 개혁을 돕다

1518년 11월 22일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초조하게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뒤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청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되어 와 있었던 것이다. 초조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어린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 죽는다면, 후회는 없다네. 그러나 그대와의 말 할 수 없이 달콤한 교제가 중단되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렵다네.”

루터가 죽음보다 관계가 끊어질까 더 두려워했던 이 젊은 교수는 누구일까? 그 교수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었다. 멜랑히톤은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다. 독일의 루터 도시 비텐베르크 광장 앞에 가면 루터 동상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또 하나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동상이 멜랑히톤이다. 종교개혁 하면 흔히 루터와 칼뱅을 연상하고, 그들을 도왔던 조력자들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츠빙글리는 칼뱅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으로, 멜랑히톤은 루터의 그늘에 가린 보조 출연자 정도에 그치고 있다.

루터는 멜랑히톤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칭하곤 했다. 실제로 멜랑히톤은 루터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기초한 인물이다.

멜랑히톤의 본명은 독일식 이름 필립 슈바르츠에르트(Philipp Schwartzerdt)다. 슈바르츠에르트는 검은 땅을 뜻한다. 이 이름을 희랍어로 바꾼 것이 멜랑히톤이다. 멜랑히톤은 천재였다. 그는 1509년 12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2년 뒤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바로 2년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18년 21세의 나이에 종조부 로이힐린의 도움으로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멜랑히톤의 종조부 요하네스 로이힐린은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멜랑히톤은 그에게서 어려서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로이힐린은 에라스무스와 친분도 있었다. 그 덕분으로 멜랑히톤은 에라스무스도 알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15년에 어린 천재 멜랑히톤을 극찬하며 영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오기 전 이미 여러 책을 냈다. 1518년에 출간한 ‘그리스어교본’은 여러 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대학교 학문의 개혁’이라는 취임 연설을 했는데, 신학과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인문주의 계획을 과감하게 실행하고 고전과 그리스도교 원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에는 루터 영향으로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 취임 연설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매우 해박하고 흠잡을 데라곤 없는 연설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였고, 대단히 칭송하였다.”

멜랑히톤은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종조부와 의절할 정도로 루터를 따랐다. 당시 루터는 여러 곳에서 무섭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종조부는 훌륭한 인문주의적 지식을 루터를 위해 사용하며 루터를 추종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을 떠나라고 종용했지만 멜랑히톤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종조부는 의절하고 말았다. 루터와 멜랑히톤 두 사람은 한 목표를 향해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루터 같은 사람에게는 멜랑히톤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처럼 뛰어난 고전과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논리적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루터에 대해 104가지 조목으로 정죄했다. 루터 측의 반박이 필요했다. 이때 루터를 옹호하면서도 소르본의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멜랑히톤이 썼다. 글의 제목은 도발적이게도 ‘파리의 멍청한 신학자들의 광포한 칙령을 논박함’이다. 도발적인 제목과 달리 글은 매우 치밀하게 조목들을 반박하고 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날카롭고도 치밀한 글로 루터를 옹호했다. 이미 루터는 1519년 9월 19일 성서학 학위 획득에서 멜랑히톤의 글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그의 답변은 기적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여러 명의 루터 역할을 할 것이다.”

멜랑히톤은 1521년에 ‘신학강요(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의 초판을 발행했다. 이 책은 그가 해왔던 로마서 강의를 발전시킨 작품으로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작품이다. 그는 성서에 기초하여 학문적으로 종교개혁을 옹호했다. 이 책은 루터교 신학의 최대 걸작이자 루터주의 신학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다.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이 책으로 인해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완벽하게 반박되었다고 말한다.

“당신(에라스무스)의 논증들은 멜랑히톤의 작품 ‘신학강요’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반박될 여지가 없는 이 작은 책자는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불멸의 고전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책과 비교해 보건대 당신의 책은 천하고 하찮은 것이다.”

이처럼 멜랑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교리화했다.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 전면에 나서서 주장하면, 멜랑히톤은 책과 글로 이를 뒷받침했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학자나 대학 행정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교육 헌장을 만들고 교재, 교과목의 새로운 편성 등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했다. 그의 교육개혁은 독일 전역의 대학에서 받아들여져 학생들은 그를 ‘독일의 스승’이라 불렀다.

인문주의적 성향과 행동보다 책과 글로 개혁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멜랑히톤은 어쩌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멜랑히톤은 루터 사후에 당연히 누려야 할 루터교의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루터교도들은 멜랑히톤을 배척하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