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철희 (12) 고대하던 첫 파송지는 시련의 중앙亞 이슬람국

입력 2011-10-10 17:56


서울 대치동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우리가 향한 곳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이슬람 국가였다. 한국인과 흡사한 얼굴, 친절하고도 투박한 사람들, 집 근처 재래시장은 영락없는 60, 70년대 한국 모습이었다.

이슬람에서는 특히 가족공동체, 신앙공동체를 떠나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개종을 한다면 가족이나 자신의 공동체를 배신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가족이나 이웃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우리가 방문했던 한 가정교회에서도 술에 취한 남편이 예수 믿는 아내를 칼로 찔러 병원에 옮겼으나 결국 주님의 품으로 간 적이 있다. 그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전도사는 전직 경찰이었는데, 택시 운전사였던 큰아들 역시 세 명의 괴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공격적인 자세가 여전히 존재했으나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다. 선교사라는 것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해롭게 하지 않았다. 나이 든 사람들을 공경하기 때문에 특히 시니어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점이 많았다.

그곳에는 60세 이상의 시니어 사역자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실버그룹’이라 이름을 붙이고 15가정 이상 매달 모임을 갖는데, 나는 그 모임에서만큼은 가장 막내였다. 80세에 선교사로 오신 노부부도 있었다.

대중교통으로는 주로 승합차를 이용했다. 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합승 같은 작은 미니버스인데, 대부분 독일 등 유럽에서 수입된 중고차를 개조해 만들었다. 옛 소련연방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기궤도차도 이용했다. 의자마다 삐걱거리고 등받이가 흔들리는 승합차는 짐 싣듯 사람들을 싣고 달린다. 버스 정류장도 있었지만 손을 들면 아무 데서 태워주기도 하고 내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사람들이 꽉 들어찬 승합차에 올랐다. 더 들어갈 곳이 없어 운전석 부근에 서 있는데 갑자기 운전수가 내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또다시 팔까지 휘두르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버스 뒤편으로 썩 들어가라는 말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당해 본 일이라 정신이 멍멍해질 정도였다.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내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마치 꿈속 어느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탄이 심령의 가장 밑바닥부터 흔들어대는 듯 혼란스러웠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고 한심했다. 그 이후 나는 30∼40분 거리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선교지에서 절실하게 느낀 것 한 가지는 나 자신이 얼마나 충분한 훈련이 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대부분 시니어 선교사들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훈련을 제대로 받으려 하지 않는다. 선교지에 가서도 언어도 잘 안 배우고 대충 생활에 필요한 말 정도만 익히려 한다. 그러나 세상 물이 많이 든 사람일수록 선교사 훈련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만큼 내려놓고 벗어버리고 던져버려야 할 것이 많다.

우리 부부는 WEC선교회 규칙에 따라 언어를 공부했다. 도시에서는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시골에서는 토착어를 많이 사용했다. 두 가지 언어가 다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러시아어를, 아내는 토착어를 배웠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