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88) 조선 왕조의 상징 ‘종묘사직’
입력 2011-10-09 17:27
사직공원, 장충단공원, 효창공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 왕실의 혼이 담긴 곳을 일반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공원으로 조성해 왕조의 위엄을 격하시킨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랍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묘(宗廟)가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면 사직(社稷)은 땅과 곡식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종묘사직’이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비유할 만큼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로 인식됐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개설된 사직은 고구려 고국양왕 때 한반도에 처음 도입됐지요. 이후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워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5년 경복궁·종묘와 더불어 사직단을 건립해 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답니다.
주요 시설로는 정문(보물 제177호)과 홍살문 등이 있는 사직단, 악공청(樂工廳)과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는 재실, 안향청(安香廳)과 동서월랑(東西月廊) 등이 있는 사직서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195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596∼1603년 복구돼 조선 왕조 500년의 영욕과 함께 했지요. 그러다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직공원으로 바뀌면서 비운을 맞이했답니다.
1900년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명하여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이하 여러 장병을 기리도록 한 장충단은 1919년 공원으로 격하되고, 조선 정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 책봉까지 받았으나 다섯 살 때 요절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효창원 역시 1924년 공원으로 바뀌는 수모를 당했답니다. 해방 이후 원래 이름을 찾았으나 공원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사직단은 공원으로 조성된 이후 영역이 축소되고 현대시설물 등이 들어서 문화유산의 상징적 의미와 가치가 퇴색하고 말았습니다. 1963년 이곳이 사적 제121호로 지정돼 보존 관리에 나섰지만 전문 인력과 재원 부족으로 복원 사업은 부진했지요. 관리 주체가 문화재청이 아닌 서울시 종로구라는 점도 훼손된 사직단의 복원 정비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묘는 반듯한데 사직은 허술한 문화재 관리의 이중적 실태에 문화재청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실과 국가를 뜻하는 종묘와 사직의 상징성을 회복하고 국가제의(國家祭儀) 장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선의 궁궐·왕릉과 함께 내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했다는군요. 변형·훼손된 사직단의 복원 정비를 연차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도 세웠답니다.
겸재 정선이 18세기 초에 그린 ‘사직단도(社稷壇圖)’를 보면 네모 반듯한 공간에 각종 건물이 가지런히 배치되고 주변에는 숲이 우거진 모습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기록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사직단은 옛 경치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사직단이 하루빨리 원형대로 복원돼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대합니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