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회심-이성희 변호사] 법보다 복음! “법률가 바울이 모델”

입력 2011-10-09 18:05


변호사 사무실 같지 않았다. 책상 위엔 소송 서류 대신 성경책, 기독교 서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엔 ‘예수’ ‘복음’ 등의 문구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이성희(43)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와이셔츠 팔을 걷은 채 전화통을 붙잡고 한참이나 소송 관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변호사는 “의뢰인 중 상태가 심각한 사람은 따로 불러 복음을 전하고 있다”며 “복음만이 갈등의 화해자이고 상처의 치유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변호사는 복음을 듣고 우울증이 낫거나 마음의 안정을 찾는 의뢰인이 많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용한 변호사’란 별명이 그에게 따라붙고 있다. 요즘은 병원에서도 포기한 불치병 환자가 그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올 정도다.

내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대대로 신주 단지를 모시는 무속신앙이 우리 집안의 전통이었다. 우리 집안은 평안, 기쁨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농사일을 준비했던 부지런하고 마음씨 좋았던 아버지는 점심시간만 되면 인사불성이 되곤 하셨다. 술 때문이다. 오후가 되면 집안엔 본격적인 난리와 소동이 일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고, 아버지와 자식들이 고함을 지르고, 자식과 자식 간에 삿대질을 했다. 술 취한 채 경운기를 몰다 섬진강에 빠진 아버지를 꺼내오는 일은 자식들의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평안’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안

교대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난 큰누나가 어느 날 동생들을 죄다 서울로 불러올렸다. 어린 동생들을 험악한 분위기에서 구출하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내 나이 여덟 살에 시작된 서울생활은 평안하지 않았다. 결혼한 큰누나는 동생들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조금만 잘못해도 그냥 두지 않았다. 누나들끼리 또다시 싸움판이 벌어졌다. 폭력과 고성이 오갔고, 나는 그 와중에 발가벗겨진 채 집안에서 내쫓기기 일쑤였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말 없는 아이’였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방학이면 시골로 내려가 농사일을 돕느라 방학 내내 숙제라는 건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농사일을 도우며 느낀 것은 그래도 공부가 가장 쉽다는 거였다. 그래서였는지 공부를 하면 공부가 잘되는 편이었다.

서울대 입학, 하지만 인생 공허를 느끼다

문과 수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률가로서의 꿈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남들이 법학과에 가면 좋다고 해서 지원한 것이다. 입학 1주일이 지나고 나서부터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학년 때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고도 자동차까지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렇게 벌고 싶었던 돈인데 막상 돈을 벌고 보니 마음속에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30대, 40대, 50대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고 싶었다. 2학년 말에 사촌누나의 소개로 서울 신촌동 연세대 앞에 있는 한 가정교회에 가게 되었다. 외국인 목사님이 가르치시는 성경 강의를 듣는 순간 내 귀가 열리는 것 같았다. ‘기독교도 여러 가지 진리 중 하나이겠거니’ 하고 찾아간 것인데 그 성경 강해가 나를 확고한 진리로 인도할 줄은 몰랐다.

나는 성경을 파헤치느라 매일 교회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3학년 1년 동안은 전공과목 수강을 취소하고 비전공과목 한 과목만 수강하며 성경 연구에 몰입했다. 성경이 사실이고 진리라면 졸업을 1년쯤 늦추는 게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봤다. 그 1년간 나는 매일 성경이 주는 충격에 빠져 살았다.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면서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으로 믿었고 영혼으로 묵상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기쁨과 평안이었다. 나는 성경을 보면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법률가 바울을 나의 모델로 삼았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최고의 로스쿨 출신 법학자이자 하나님의 법에 능통한 변호사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좇아가다 보면, 내가 가야 할 길과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이 보였다.

교회 선배들의 권유로 3학년 말엽에야 고시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어떻게 해야 바울처럼 이 복음을 평생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졸업 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에서 법원, 검찰 실무수습 과정을 밟던 중 기독변호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생업의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변호사 실무를 감당하면서 가장 많이 맡게 되는 사건이 이혼 소송이었다. 두 사람 모두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변호사의 영적인 터치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당 얼마씩의 선임료만 받고 내 할 일을 끝내버리는 태도는 아예 버리기로 했다. 각 관계 속에 뛰어들고, 그들의 아픔 속에 개입하기로 작정했다. 그와 같은 나의 계획은 그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전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이혼하려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는 실제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변호사라고 하면 고상한 삶을 살 거라 여긴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비규환 같은 싸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삶과 죽음이 큰 차이가 없는 이들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이유다.

◎ 이성희 변호사는

경남 하동 태생. 법무법인 소명·기독법률가모임(CLF) 창립멤버. CTS 기독교방송, 카이스트, KBS ‘소비자 고발’ 고문변호사. 온누리교회 출석. ‘하나님의 법’ 저자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