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2) 일본의 침략과 기독교
입력 2011-10-09 18:03
일제, 선교사엔 ‘달래기’ 교회엔 ‘힘빼기’ 전략
일본의 침략과 기독교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수용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제가 된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부터지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이미 1870년대부터 나타난다. 즉 대원군의 실각(1873)과 개항(1876) 이후 한국은 일본의 영향 아래 있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일본의 현존은 한국인의 신앙의식, 민족주의, 교회형성, 신학운동 등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1876년 일본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조선 대표 신헌(申櫶) 사이에 체결된 전문 12조의 병자수호조약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1조)고 명시하므로 청의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 진출의 길을 열었다. 일본 세력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던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했다. 청일전쟁(1894∼5)을 일으켜 청을 제거한 일본은 러일전쟁(1904∼5)을 통해 러시아를 물리침으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 외교권을 강탈하고,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차례로 탈취하였다. 이어서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켜(1907년) 국방력을 마비시키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침략과정을 거쳐 1910년 8월 ‘합방(合邦)’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통감부(統監府)는 총독부(總督府)로 승격되었고, 자기들의 표현대로 총칼에 의한 무단(武斷)정치를 감행하였다.
일본의 조선탄압 정책
곧 식민지배를 위한 정책이 수립되었다.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하여 ‘헌병경찰 제도’를 수립하고 제1대 경무총감으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完二郞)가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2월 3일 제령(制令) 제10호로 ‘범죄즉결법’을 발표하였다. 이 법안은 피의자 진술과 경찰서장 인증만으로 즉결 처형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로써 뒷날 105인 사건과 그 후 모든 탄압정치에서 보여준 바처럼 혹독한 고문으로 얻는 자백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곧 언론기관이 폐지되었고 경향 각지에 헌병경찰을 풀어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서적들을 압수하여 불사르거나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편찬하여(1915) 아시아사의 한 부분인 조선의 역사를 반도사로 국한시키고,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식민사관을 수립한다.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조선인에게는 교육의 기회와 학습 영역을 제한하였다. 또 민족운동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일본은 무단통치를 시행하면서도 이것이 한국인의 문화 수준에 적당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드디어는 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등 민족말살정책으로 발전하였다. 후에는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침탈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인의 신교(信敎) 자유를 억압하고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기독교정책
기독교는 일본의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1910년 이래 한국 사회와 국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에 의해 이듬해 2월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외국인 선교사를 우대하고 회유하여 대외선전에 이용하고자 했고, 교회나 청년운동단체를 후원하여 의식 있는 민족주의 운동이나 기독교회의 반일운동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3대 통감을 거친 후 조선총독부 초대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열성적인 불교도로서 기독교를 혐오, 적대시하면서 냉혹한 무단정치를 강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10월 5일 신임 각 도(各道) 장관회의에서 총독부 시정개시의 첫 훈시를 통해 “조선에서는 기독교가 비교적 번창한 것으로 본다. … 고금을 통하여 신앙은 자유라고 하나 내가 통치하는 조선은 기강이 문란할 때에는 그 내용을 바꾸어 정치상 필요한 통제를 해야 한다. 종교 관계의 학교와 같이 상당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교사가 관계하고 있으므로 “서로 쓸데없는 논쟁을 야기시키지 않도록 주의하고” “당사자의 감정을 해치지 않도록 적당히 취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일본이 한국을 합병할 당시 조선 기독교회는 20만 신도와 300개 이상의 학교, 3만명을 넘는 학생, 그리고 1900여개의 집회소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300여명, 그밖에 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경영하는 강대한 조직이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구미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 여론과 직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는 조선총독부의 중대한 현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식민지배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