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민자의 ‘1인칭 디아스포라’… 변소영 소설 ‘뮌헨의 가로등’

입력 2011-10-07 18:10


재독 소설가 변소영(48)은 자발적 이주민이다. 대학 3학년 때 독일 유학을 떠나 독일 국적의 한국 입양아와 결혼해 30년째 독일에서 살고 있다. 2010년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그가 등단했을 때 우리 문학의 지평이 좀 더 넓어질 것이라는 문단의 예측은 최근 나온 첫 소설집 ‘뮌헨의 가로등’(실천문학사)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동안 한국 문학사에 비친 독일의 이미지는 전혜린의 낭만적 노스탤지어, 동백림 사건, 산업화 시기의 광부와 간호사 파견, 그리고 베를린 장벽 붕괴에 따른 독일 통일 등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통일 이후의 독일 이야기, 특히 재독 한국인 삶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채워야 할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변소영은 이 빈 자리를 파고든다.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이 소설집이 특별한 이유는 이주민 1세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타향살이의 서러움이나 고향을 향한 그리움, 혹은 성공신화 콤플렉스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사실 나는 딸아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더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초로의 남자와 함께’라는 랄프의 말 때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딸아이가 분명 그 초로의 남자를 따라다니고 있을 것만 같아 회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남편이 죽은 후 다섯 살짜리 딸아이는 몇 번씩이나 모르는 남자를 따라갔다.”(154쪽)

독일 유학을 왔다가 결혼한 남편이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뜬 후 남겨진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표제작은 뮌헨 중앙역을 배회하는 사춘기 딸 ‘지나’와 딸을 찾아 거리로 나선 엄마의 육성을 교차 방식으로 들려준다. 지나는 엄마의 독단과 강요에 반발해 가출하는데 이때 만난 구원의 멘토가 초로의 노숙자 막스이다. 도심 쓰레기통을 뒤져 모은 병과 깡통을 팔아 연명하는 그는 또 다른 루저이다. 하지만 막스는 자상하게 지나를 보살피면서 거리에서 체득한 세상의 이치와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

지나는 막스와의 이틀간에 걸친 동행을 통해 엄마와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에 몸을 싣는다. 이들 모녀에게 독일은 더 이상 낯선 땅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지속해야 할 ‘지금 여기’인 것이다.

“마음이 창문보다 더 어두워졌다. 조금 아까 통화했던 랄프의 말이 떠올랐다. 난 걔 눈을 들여다볼 때면 뮌헨의 어느 가로등보다 환한 빛이 느껴져. 내가 아니라 딸이 내게 빛의 의미였나 보았다. 그 빛을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나 보았다. 아, 지나야….”(196쪽)

‘더티 댄싱’의 화자인 ‘나’는 파독 광부의 딸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한 교민 2세다. 지하 갱도에서 석탄가루를 마시며 일하던 아버지는 여행사를 인수해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성공하지만 카지노에 드나들다 재산을 탕진하고 종적을 감춘다. ‘나’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주변 남자에 대한 왜곡된 집착으로 이어진다.

‘나’는 자신이 경리로 근무하는 회사의 독일인 사장과 내연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한국인 유부남 유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나’는 회사 공금을 횡령해 함부르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애인에게 전달하는데 이러한 ‘나’의 행동은 애인이 공부에 매진해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가 동쪽으로 인생의 새로운 항해를 떠나는 날 나는 마지막 인사로 그에게 이런 어른스러운 말을 해줄 것이다. 남자에겐 딸이 하나 있어야 해요. 그러니 돌아가면 딸을 하나 꼭 낳아요.”(29쪽)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렇듯 자발적으로 독일에 남는다. 아니, 살아간다. 작가는 이산의 고통 앞에 주눅이 들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지도 않고, 이주의 망망대해 어딘가에 떠 있을지 모르는 유토피아의 섬을 학수고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자발적 이민자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고통의 근원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관찰하며 그 상처 극복의 징후를 조심스럽게 예시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변소영 소설은 재독 한국인의 1인칭 디아스포라이다”라고. 독일 보훔에 살고 있는 그는 “모든 시간은 소설을 만들어준다”며 “세속적인 삶의 때가 묻어야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