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노벨문학상 영예… 높은 곳에서 세세한 세상사 내려다본 ‘말똥가리 시인’

입력 2011-10-07 00:55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80)는 스칸디나비아 지역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인 가운데 한 명이다. 스웨덴 한림원의 이번 결정은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유럽 출신이 아닐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깬 파격적인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또다시 유럽 출신 문인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트란스트뢰메르가 그만큼 서구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임을 방증한다.

누군가=그는 1931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3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스톡홀름 대학을 졸업한 이후 린쇼핑, 베스테로스 등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가 장애인과 범죄자,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詩作)과 병행한 점을 두고 AFP는 “그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꾸준히 적극적인 헌신을 해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50여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1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작(寡作)의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 과정을 통해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이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페테르 엥글룬드 한림원 종신 서기는 트란스트뢰메르가 “역사와 기억, 자연, 죽음 같은 중대한 질문에 대해 집필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반신마비로 대화가 어려울 만큼 건강이 악화됐으나 작품 활동은 계속했다. AFP에 따르면 올해 초 아내 모니카를 배석한 스웨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6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돼 있을 만큼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돼 있지 않다. 2004년 들녘출판사에서 ‘기억이 나를 본다’라는 제목의 시선집이 발행된 게 유일하다. 이 시선집은 ‘오늘의 세계 시인’ 시리즈 중 하나로 시인 고은이 책임 편집했다.

문학세계=스물세 살인 1954년 ‘17편의 시’라는 시집으로 데뷔한 트란스트뢰메르는 이후 곧바로 스웨덴 서정시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이 된다. 1940년대에 스웨덴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첫 세대가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를 잇는 후발 주자인 셈이다. 1987년 시선집이 영국에서 출간되면서 유럽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스웨덴 자연시’라는 토착적 전통 위에 모더니즘의 세계를 펼쳐보였다.

그가 추구한 모더니즘에는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이나 T. S. 엘리엇의 ‘몰개성의 시론(Poetics of Impersonality)’ 등이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정의 비밀’(1958년), ‘미완의 천국’(1962년)을 발간한 그는 1970년대에는 ‘어둠의 비전’(1970년) 등 4권의 시집을 잇달아 발간했다.

초기에 불, 물, 녹음(綠陰)의 이미지를 탐구한 그는 중기에 접어들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드러낸다. 이런 자유분방함은 기독교 신비주의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런 시 세계를 펼친 덕분에 그는 스웨덴에서 ‘말똥가리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말똥가리처럼 높은 곳에서 신비주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지상의 세세한 일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각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상열 한국외대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는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운율적인 면에서 굉장히 리드미컬하다”며 “그의 은유는 핀란드 등 북유럽 신화에서 따온 것이 많다”고 말했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가 난해하게 여겨지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미지가 촘촘하게 엮여 있는 탓에 배경의 의미를 찾기가 무척 어렵다”며 “하지만 워낙 시 세계가 깊이 있기 때문에 영미 등 서구권에서 높이 평가받아 왔다”고 전했다.

다만 그의 시에 나타난 자유분방함은 기독교 신비주의 차원과 긴밀히 연관된다는 점 때문에 한때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종교적 경사가 심한 반면 상대적으로 정치사회적 맥락이 거세돼 있다는 것이다. 특히 눈앞의 정치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 핵심이지만 그의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정치사회적 발언을 시적으로 전혀 내비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급진도 반동도 아닌 제3의 길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그의 전반적인 중용의 인생관, 혹은 ‘침묵과 깊이의 인생관’에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00%’라는 표현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진실은 100%와 0% 사이의 어느 지점에 신비롭게 숨어 있으며, 그 신비스런 진리의 길을 올곧게 따라가는 것이 ‘똑바로 선 인생’의 길이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김성곤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기억이 나를 본다’의 추천사에서 “트란스트뢰메르는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자연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서구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적 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극의 얼음이 해빙하는 곳, 또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며 “북극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 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우주를 창조해낸다”고 그의 문학 세계를 평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