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철희 (10) 경건·검약·노동의 참기쁨 가르쳐준 ‘캠프힐’

입력 2011-10-06 20:19


회사를 사임한 이후 우리 부부는 선교훈련원(MTI)에 들어가 3개월 훈련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캠프힐에서 9개월간 WEC 선교사 훈련을 받기 위해서였다. 캠프힐에서 70명의 선교사가 공동체 생활을 했다. 아침마다 드리는 경건의 시간은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 이어졌다. 별것 아닌 작은 일에도 함께 기뻐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 땅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구나’ 생각될 정도였다.

우리는 침대 책상 소파 싱크대 등이 한 공간에 있는 작은 방을 사용했다. 하지만 캠프힐 선교사들은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훌훌 떠날 사람처럼 그야말로 ‘심플 라이프’였다. 그곳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빵이나 우유, 채소, 캔 등을 1주일에 두세 차례 가져다 먹었다. 유통기한이 막 지난 식품은 팔 수 없지만 몸에는 해롭지 않다. 식품회사 사장을 지낸 나도 9개월 동안 날짜 지난 식품을 먹었다.

본관 지하실에는 퍼싱룸이란 곳이 있다. 그곳에는 기증된 헌옷들이 손질돼 있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으면 입을 수 있고, 또 필요 없으면 다시 손질해 갖다 놓았다. 우리도 그곳에서 철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가져다 입었다. 그곳에서는 좋은 옷이나 새옷은 입을 필요도 없지만 그런 것을 입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욕심만 조금 버리면 풍족하게 살 수 있음을 캠프힐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아파트 한 평이라도 더 크게 늘려 보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삶이 한 조각 휴지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공동체를 한국본부에서도 실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곳의 역사와 운영 체계, 리더십 특성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도서실에서 자료를 찾았고 각 부서를 다니며 선교사들과 대화를 했다. 나의 영어 지도 선생님이었던 린다 스미스는 “철희는 한국에서 온 스파이예요”라고 말할 정도로 그곳 공동체 생활을 조사하고 다녔다.

오전에는 주로 강의시간이었고 오후에는 노동을 했다. 아내는 부엌에서 식사 당번을 주로 했고, 나는 거의 중노동을 했다. 목공 페인트 미장 잔디깎기 흙나르기 등 육체노동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날까지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미국 훈련생들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일들을 척척 해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숙련공이고 나는 그저 보조 역할밖엔 할 수 없었다. 서양인 가정은 자녀에게 이런 일을 어려서부터 많이 시켜서 잘하는 것 같았다. 요즘 젊은 한국인은 망치 한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는 노동이 힘들어 3시간 정도 일하면 저녁식사도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 직원들이 내가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사장님, 도대체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어이없어할 것 같았다. 그래도 훈련기간 중 내게 가장 유익했던 시간을 말하라면 노동시간이었다고 할 것이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참 좋은 훈련시간이었다.

선교사 훈련은 지금까지의 사회생활에서 입었던 옷에 선교사라는 옷을 하나 덧입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경험과 지식, 사회적 지위, 생활습관, 가치관들을 모두 내려놓는 훈련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