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뻣뻣한 戰犯기업 미쓰비시… “제2의 아리랑 3호 꿈꾸지 마”
입력 2011-10-06 21:21
#독일의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BMW의 최대 주주인 콴트 가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를 위해 무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콴트 가문은 최근 자신들의 과거를 고백하는 1200쪽 분량의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가문의 창업주인 귄터 콴트는 그의 아들 헤르베르트와 함께 폭탄, 총알 등을 만드는 무기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 5만여명의 노동자가 노예 취급을 받았으며, 매달 평균 80명이 착취에 시달려 사망했다. 콴트 가문 측은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진실을 피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고백했다.
#독일의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휴고보스가 2차 세계대전 때 강제 노역에 동원한 사람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나치 친위대(SS)의 제복과 육군 군복 등을 만든 이 회사는 폴란드인 140명, 프랑스인 40명 등 총 180명 정도를 열악한 환경에서 혹사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이 회사 필리프 볼프 수석 홍보 부회장은 “우리는 아무것도 숨기길 원치 않는다”며 “나치 시절의 행적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휴고보스에 관련된 피고용자, 고용주, 고객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의무”라고 말했다.
너무나 대조적인 일본 기업들
지난달 말 외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이다. 히틀러의 전쟁범죄에 가담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부당이득으로 몸집을 부풀렸던 독일 굴지의 기업들이 과거를 뉘우치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는 소식이 종전(終戰)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그런데 BMW와 휴고보스 등의 사례를 해외 토픽으로 접하면서 우리가 단지 흥미로워하거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의 기업들도 2차대전 당시 똑 같은 형태의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이후의 태도는 독일 기업들과 너무나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한 당시 기업들은 식민지 조선인들을 한반도와 일본 본토, 나아가 러시아 사할린과 남양군도에까지 끌고 가 탄광, 조선소, 무기공장 등의 작업장에 내몰았다. 그런 징용 피해자가 연인원 600만∼700만명에 달했다. 조선인들을 개별 작업장에 투입하고 관리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일본 기업이었다. 그러나 명백한 전범기업들이 지금까지 강제동원 사실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다. 남은 건 죽거나 다친 피해자와 유족들의 풀 길 없는 한(恨)뿐이다.
행동에 나선 의원들
그런데 최근 국회에서 파격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일본 전범기업들을 명확하게 타깃으로 삼아 정책적 불이익을 줄 수단을 구체적으로 강구한 것이다. 반성 없이 역사 왜곡만 일삼는 일본 기업들에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자는 차원인데, 의원들이 선택한 방안은 ‘공공기관 사업 입찰 제한’이었다.
주역은 자유선진당 이명수 의원이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인 이 의원은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국가계약법)’ 개정안을 지난해 10월 대표발의해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일본 기업이 대한민국 정부 및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게 골자다.
여야 의원 상당수가 법안 취지에 공감을 표시했다. 특히 국가계약법 소관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 의원들이 구체적인 논의에 착수했다. 하지만 개정안을 관철시키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이었다. 정부조달 분야를 국제경쟁시장에 최대한 개방하자는 취지에서 체결된 이 협정 제3조는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대우를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계약 외의 사유를 들어 특정 일본 기업의 입찰을 차단할 경우 협정 위반으로 제소당할 우려가 있다. 관계 부처인 기획재정부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고민 끝에 의원들은 우회로를 선택했다. WTO 협정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공공기관에 한해서만 입찰 제한을 시행토록 하자는 방안이다. 정부조달협정상 개방 대상은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18개 공공기관 등이 있다. 그러나 협정 대상이 아닌 공공기관도 얼마든지 있다. 전부 꼽아보니 263곳이나 됐다. 열성적인 의원들은 기재부를 설득해 동의를 이끌어냈다.
국회 상임위에서의 불꽃 튀는 설전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엊그제가 예순여섯 번째 광복절이었지만 일제 피해자들 중에는 아직도 실질적으로 해방되지 못한 피해자들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일본이) 제대로 된 보상도 안 해 주고, 연금이라고 겨우 99엔을 지급하지 않나. 그러다가 엊그저께는 또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고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하고. 지금 갈수록 일본의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만행이 심화되고 있는데 우리만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되느냐는 얘기지요.”
지난 8월 18일 기재위 경제재정소위원회 회의장. 입찰 제한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소위원장인 민주당 이용섭 의원은 일본 측 행태에 울분을 터뜨렸다. 이 의원은 국제 조약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전범기업들에 대한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제재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획재정부 류성걸 2차관과 여야 참석자들은 대체로 수긍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 문제였다.
나흘 뒤인 22일, 다시 소회의장. 참석자들은 전범기업에 대한 입찰 제한을 법률로 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일단 이 의원의 개정안은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냈다. 대신 개방 대상이 아닌 공공기관 263곳에 정부와 국회의 이름으로 관계 지침, 즉 공문을 하달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기재부 측에서 문안을 작성해 제시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국제 입찰과 관련한 국가계약법 개정안(과거사 미청산 일본 기업에 대한 국가발주 입찰제한·이명수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에서 논의된 바 있음. 귀 기관은 정부조달협정 상 개방 대상 공공기관이 아니므로 국제 입찰을 실시하는 경우 위 국가계약법 개정안의 발의 취지를 감안하여 계약 업무를 처리하여 주기 바람.’
그러나 공문 문안에 찬성하는 의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전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 “그런데 공문에 이렇게 쓰는 게 맞아요? ‘개정안 발의 취지를 감안하여 계약 업무를 처리해라’ 이게 공문 형식으로 맞는 것입니까?”
이용섭 의원: “중국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대부분 국가가 계약을 체결하지요. 그런데 전범기업들에 대해서는 일절 계약 체결을 못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니시마츠건설에 대해서도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다 보상을 실시한 이후에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해 줬거든요.”
이한구 의원: “그런데 개인 같으면 몰라도 기업을, (일제 때와 달리) 기업의 주인도 바뀌고 그런 판인데 그것을 2차대전 때 어떻게 했다고 지금 와서 페널티(벌칙)를 물려야 된다는 생각이 좀 이상한 것 아니에요?”
이용섭 의원: “기업주는 바뀌었다 하더라도 기업 법인 그 자체가 주체지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같은 경우는 그 당시 13살, 14살 먹은 초등학생으로 끌려가서 헬리콥터 만드는 곳에서 일했었는데, 지금 그 기업(미쓰비시중공업)이 할머니들하고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보상을 안 해 줍니다. 계속 차일피일 미루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형태라도 정부가 지원을 해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한구 의원: “글쎄, 나는 이게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옛날 일이고, 법인을 지금 법인하고 똑같이 취급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고…. 우리도 합리적인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하고 우리 국회가 합리적으로 움직여 줘야지.”
한나라당 김성식 의원: “이 건의 경우는 법률로 제안된 건을 공문 조치로 바꾸면서 전반적으로 실효적인 대응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돼야 할 것 같습니다. WTO 관련해서 얼마든지 논의의 복잡성도 피해 나갈 수 있고, 이런 조치를 통해 민간 차원의 협상에서 좋은 성과가 있을 수 있다면 긍정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한구 의원: “정부에서 받아들일 만하다 그거예요?”
임종룡 기재부 1차관: “예, 그래서 문안을 정리해 왔습니다.”
한나라당 권경석 의원: “‘국회에서 논의된 바 있음’ 이것을 꼭 집어넣어야 돼요?”
김성식 의원: “그걸 넣지 않으면 정부가 스스로 판단해서 집행하는 게 되기 때문에 정부 부담이 더 커지지요.”
민주당 이종걸 의원: “오히려 국회에서 이렇게 입장을 정해 준다는 것이 정부로서는 피해 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권경석 의원: “알았습니다.”
이한구 의원: “저는 반대예요.”
이용섭 의원 “그럼 이한구 의원님 의견은 소수의견으로 기록해 주시고요.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아리랑 3호 입찰, 다신 꿈도 꾸지 마라
우여곡절 끝에 정부와 국회는 공문을 하달하는 데 합의를 봤다. 공문은 바로 그 다음날 해당 기관 263곳에 발송됐다. 수신처에는 우선 한국전력, 도로공사, 철도공사, 마사회,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공기업이 27곳 포함됐다. 그리고 국민연금공단, 국민건강보험공단, 농수산물유통공사, 에너지관리공단, 도로교통공단, 신용보증기금 등 준정부기관이 84곳 들어갔다. 이 밖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사학진흥재단, 국제교류재단, 국방연구원, 대한체육회, 예술의전당 등 기타 공공기관 176곳이다.
공문에서 주문한 내용이 실제 적용되면, 예컨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2008년 10월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3호’의 발사 사업자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선정했던 사례는 되풀이되기 어렵다. 일제 때 미쓰비시중공업 소속 비행기 제작소에 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오랜 법정 투쟁에도 불구하고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을 받은 ‘99엔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각종 수력·화력발전소를 히타치가 제작·공급하는 일도 계속되기 힘들다. 한국동서발전은 지난해 7월 국내 최대 화력발전소로 건설될 당진화력 9, 10호기의 주기기(보일러 및 터빈 발전기 부문) 우선협상 대상자로 히타치 등을 선정한 바 있다. 입찰 제한이 실시되면 일본 기업들이 크게 당황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공문은 일단 내려보냈지만 아직 보완할 조치가 남아 있었다. 어떤 일본 기업에 대해 입찰을 제한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목을 해줘야 하는데, 그때까지 전범기업에 대한 체계적인 리스트가 국내에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다시 이명수 의원이 나섰다. 그는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의 협조를 얻어 총 129개사로 이뤄진 ‘일본 전범기업 1차 목록’을 작성, 지난달 16일 정부에 전달했다. 1차 목록에는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아소, 히타치, 닛산, 니시마츠건설 등 거대 그룹과 중견 기업들이 망라됐다.
일반 국민이나 강제동원 피해자들도 잘 모르는 사이 주사위는 던져졌다. 일본의 통상 보복 가능성 등 여러 난관도 예상된다. 한국의 입법부와 행정부가 함께 추진하는 일본 전범기업들의 입찰제한 조치가 향후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글·사진=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