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5) 中 산둥성 선교지 1100㎞ 대장정
입력 2011-10-06 19:49
도교·유교의 중심 ‘태산’ 아래 십자가 우뚝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21세기 새 찬송가 445장(통일 502장) 1절의 한 부분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의 애창곡이다. 이 곡은 1899년 헨리 제프리스 젤리 작사, 조지 해리슨 쿡 작곡으로 태어났다. 원곡은 명확하게 태산이라 명명하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오버 더 마운틴(Over the mountains)’를 태산으로 번역한 것이다.
지난달 22일부터 29일까지 100년 전 한국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제2차 취재팀이 산둥성 주요 지역을 샅샅이 누볐다. 26일 렌터카로 라이양(萊陽) 칭다오(靑島) 지난(濟南)을 거쳐 타이산(泰山, 한국명 태산)과 취푸(曲阜)로 1100여㎞ 거리를 이동할 때 이 곡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생소한 이국 땅 라이양에 첫 부임할 때 태산준령을 눈앞에 둔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성스러운 요청에 따라 믿음으로 고국을 떠났지만 그 땅에서 그들을 반기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매우 척박한 곳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게 산둥성의 마지막 한국 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의 증언이다. “이미 중국서 선교하고 있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 중국교회에 조선선교사 파송에 대해 의뢰하였을 때 표면상으로는 옳다고 칭찬하였으나 속으로는 어린 교회가 벌써 무슨 선교를 할 수 있으랴 생각했다. 그래서 산둥성 복판에 위치한 한 마을 라이양을 선교해보라고 시험 삼아 추천하였던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라이양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서양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사역했다. 라이양 선교는 1862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헌터 코벳(郭顯德) 목사가 산둥성 각처를 순례하면서 시작됐다. 코벳 선교사가 중국에서 전도의 결실을 맺은 첫 교인이 라이양 출신 왕(王)모씨였다. 그 후 45년간 라이양 성밖에서는 교인이 배출됐었지만 라이양 성내에서는 단 한 명의 교인도 얻지 못했다.
도교와 유교 속의 약체 기독교
취재팀이 찾은 타이산은 중국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이곳은 도교의 성지다. 타이산에서 남쪽으로 88㎞ 떨어져 있는 취푸는 공자(孔子)의 고향이다. 남쪽으로 113㎞ 떨어져 있는 쩌우청(鄒城)은 맹자(孟子)의 고향이다. 이 때문에 산둥성은 유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지난달 26일 늦게 타이산이 있는 타이안(泰安)에 도착한 터라 취재팀은 다음 날 일찍 해발 1532m에 달하는 타이산에 올라갈 수 있었다. 타이산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조선 중기의 문인 양사언의 시조(태산가·泰山歌)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泰山雖高是亦山)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은(登登不已有何難) 사람은 아니 오르고(世人不肯勞身力) 뫼만 높다 하더라(只道山高不可攀).’
타이산에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공자의 사당뿐 아니라 수십 개의 도교 사원이 버티고 있었다. 산 정상 위황딩(玉皇頂)에도 도교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타이산을 등정하면서 중국인들이 사원마다 들려 향을 태우고 열쇠를 채우며 복을 빌고 있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현대 중국인에게 도교는 종교 이상의 의미였다.
도교의 막강한 영향력 탓인지 타이안에는 정부가 공인한 소위 삼자교회가 한 곳뿐이다. 1900년 미국 감리교가 세웠던 타이안시기독교회. 현재 이 교회는 산둥성 역사 우수건축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주일예배는 오전 7시30분, 9시30분과 저녁예배 등 세 차례 진행되고 있다. 취재팀은 지상에 드러나지 않은 가정교회가 여러 곳에 있다고 들었지만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지난에는 공식교회가 다섯 군데에 달한다. 1916년 중화기독교자립회가 건립한 징쓰루(經四路)교회를 비롯해 허우짜이먼(後宰門)교회, 난상산제(南上山街)교회, 위중리(裕忠里)교회, 관자잉(官札營)교회 등. 현지 안내인은 “징쓰루교회의 역사를 상징하는 의자가 예배당 내 그대로 보존돼있고 매주 평균 출석교인은 1500여명에 이른다”며 “매년 성탄절이면 밀려드는 교인들을 예배당에 모두 수용할 수 없어 교회 바깥에 모니터까지 설치해 예배를 드린다”고 소개했다. 현재 징쓰루교회는 주일예배뿐 아니라 주중에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타이산 등정에 이어 취재팀은 차량으로 1시간여 달려 취푸에 도착했다. 취푸는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후손이 대대로 살던 공부(孔府), 공자와 그의 후손들 무덤인 공림(孔林) 등 세부분으로 나뉜다. 공림 안 공자의 묘 앞 비석에서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는 원나라 성종이 1307년 공자에게 내린 시호이다. 취푸 사람들은 ‘왕’이란 글자를 쓸 수 없었기에 비석의 ‘왕’자 마지막 현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다른 비석으로 가려 ‘왕’이 마치 ‘간(干)’처럼 보이게 했다. 공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수교’를 지나가야 한다. 주수교에는 ‘문관’과 ‘무관’ 모습을 한 거대한 석상이 서있다. 공자의 묘 앞을 관리가 지킨다는 건 후대에 그가 왕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초기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 유교와 도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1900년 산둥성을 휩쓸었던 ‘의화단운동’의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19세기 말 결성된 비밀사회단체 의화단이 옌타이 등지에서 교회와 외국대사관을 공격하며 외국인과 중국인 성도들을 대량 학살한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중국 기독교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천만 다행스럽게 한국 선교사들이 활동하기에 앞서 산둥성에서 1908∼1909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1월의 평양대부흥이 중국에도 불을 지핀 것이다. 후난(湖南)성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조나단 고포드 부부와 멕라렌 부부가 직접 평양을 방문, 부흥 운동을 목격한 뒤 1907년 5월 장로교 라이양대회에서 이를 소개했다. 이어 중국인 목회자 장츠전(張賜禎) 후완청(胡萬成) 류진위에(劉金岳)가 다음해 1월 평양을 방문해 부흥의 실체를 경험했다. 이들은 훗날 중국교회 부흥운동의 주역이 됐다. 산둥문과대학과 허베이(河北)성 웨이센(威縣)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황센(黃縣), 칭다오, 지난, 지닝(濟寧), 라이저우(萊州) 라이양, 옌타이(煙臺), 핑두(平度) 등지로 이어졌다.
어학공부에 힘쓴 라이양의 한국 선교사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선교사는 중국인 어학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라이양에서 사역하려면 현지 방언 또한 익혀야 했기 때문에 산둥 출신 어학선생에게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배웠을 것이다. 표준 중국어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도 산둥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크다.
초기 선교사들을 돕는 어학 선생 월급은 본국 총회 전도국에서 세운 예산에서 지출됐다. 선교사는 어학선생 월급 결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915년 가을 총회 전도국과 1916년 보고서를 보면 당시 한국 선교사들의 중국어 습득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中華民國(중화민국) 宣敎師(선교사)의 어학형편은 점점 진보하오며….” “中華民國 선교사가 다 한어를 배워 講道(강도·설교라는 의미)와 전도하는 데 잘하오며….” 설교를 잘한다는 보고이지만 사실 깊이 있는 말씀을 나누기에는 쉽지 않았을 거다. 다른 나라 말로 목회한다는 것은 일상의 대화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이양·타이안·취푸=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뱟사진 이동희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