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이 조종사와 ‘채팅’한다… 365일 잠들지 않는다, 대한항공 ‘종합통제센터’
입력 2011-10-07 02:05
추석연휴 기간인 지난달 10∼14일 김포공항을 비롯해 전국 14개 공항을 이용한 이용객은 모두 75만2019명이었다. 이 기간 중에 5306편의 비행기가 운항됐다. 공항 활주로는 뜨고 내리는 비행기로 북새통이었다.
그런데 공항이 바쁘게 돌아갈수록 긴박하게 움직인 곳이 있다. 비행 3일전부터 어떤 항로를 비행기가 이용할지, 연료를 얼마나 넣을지 등 비행계획을 세우고, 이륙 후에는 각종 정보를 비행기에 제공하는 지상의 비행통제센터(OCC·Operations Control Center)가 바로 그곳이다.
국내 민간항공사 중에 비행통제센터를 운영하는 곳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뿐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비행통제센터를 방문해 그곳에서 근무하는 풍경을 들여다봤다.
메신저로 끊임없이 소통한다
모두 5번 보안카드를 대야 했다. 정문에서 보안검색을 한 이후 대한항공 본사 8층 비행통제본부에 도착해서도 다시 4차례 보안카드를 더 찍어야만 통제센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출입절차가 까다로운 것은 이곳이 조종석만큼이나 비행기의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제센터 소속이 아니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375㎡크기의 통제센터 한쪽 벽면에는 80인치 크기의 대형 화면 4대가 연결돼 있었다. 화면 중앙에는 운항 중인 모든 항공기의 레이더 항적을 1분 간격으로 표시하는 비행감시화면(ASD·Aircraft Situation Display)이 보였다. 화면에는 세계 각국에서 운항 중인 대한항공 소속 비행기가 조그만 비행기 모양으로 나타나 있었다. 노란색 점선은 항공기의 항로를 의미하고, 노란 색 실선은 제트 기류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운항관리사인 문진씨가 이날 오전 11시 서울을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081편의 이동경로 확인을 위해 위성전화로 조종석에 전화를 걸었다.
운항관리사는 기장과 함께 안전운항을 책임진다. 운항관리사는 비행 3일 전부터 비행계획을 작성하고 이륙 뒤에는 조종사에게 끊임없이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는다. 법적으로 비행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운항관리사와 조종사의 서명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만큼 운항관리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진 운항관리사 : 코리안 에어 081, 서울 OCC입니다.
김성수 기장 : 예, 코리안 에어 081, 말씀하십시오.
운항관리사 : 081편 정상 운항 중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위치와 터뷸런스(난기류) 정보 등을 알려주십시오.
기장 : 081편 고도는 3만7000피트, 약 500노트(약 시속926㎞)로 비행 중입니다. 위치는 pintt 약 220마일 전방이구요. (pintt는 비행 항로 중 특정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비행기는 pintt를 통과하면 반드시 통과 여부와 지점, 고도, 속도 등을 통제센터에 보고해야 한다. 이날 081편은 비행계획보다 약 2분가량 먼저 pintt를 통과했다.) 현재 바람은 310도 방향으로 60노트(시속111㎞)이며 외부온도는 영하 31도입니다. 현재 터뷸런스는 없고 비행 상태 이상 없습니다.
운항관리사 :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081편은 ETA(예상도착시간)가 1500 줄루타임(줄루타임·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경도를 기준으로 한 시간) 정도로 판단되는데요. 그 시간대 뉴욕 JFK공항의 기상정보는 아주 양호합니다.
기장 : ETA가 현재 기상상태로는 1536 줄루에 JFK에 도착하는 것으로 보구요. 터뷸런스 정보와 JFK공항의 기상정보 등이 있으면 주시기 바랍니다.
운항관리사 : 약 20분 뒤 동경 177도에서 178도 사이에서 약간의 터뷸런스가 예보돼 있습니다. ETA 1500줄루 경에 케네디 공항은 바람이 130도 방향에 6노트(시속11㎞)로 불고 있습니다. 시정은 약 5마일입니다. (기장이 착륙지점에 대한 기상정보를 묻는 것은 비행기 착륙에 바람정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항상 맞바람을 안고 착륙한다. 뒷바람을 업으면 착륙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기장 : 20분 뒤 가벼운 터뷸런스 오버. 공항 정보 감사합니다.
운항관리사 : 감사합니다. 코리안 에어, 아웃.
위성전화로 기장과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문 운항사의 컴퓨터 화면에 팝업 창이 뜨면서 소리가 울렸다. 인천에서 마닐라로 향하던 대한항공 621편 기장이 KAMS를 통해 몸이 불편해 휠체어가 필요한 승객이 있으니 마닐라 공항에서 이를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KAMS는 일종의 메신저로 비행기와 통제센터를 연결해주는 데이터시스템장치다. 이 장치로 비행기 기장과 운항관리사는 마치 채팅을 하듯이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기장은 조종실 내에서 대화내용을 프린터로 출력할 수도 있다.
621편 기장은 필리핀을 강타한 제17호 태풍 ‘네삿’에 관한 정보를 KAMS를 통해 추가로 요청했다. 이와 함께 기내식 제공 과정에서 승객의 옷을 버렸으니 20달러짜리 무료 세탁쿠폰을 준비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문 운항사는 태풍정보를 기장에게 알려주고 마닐라에 있는 대한항공 직원에게 휠체어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요즘에는 1분에 8달러나 하는 위성전화보다는 KAMS와 같은 메신저를 이용해 비행기와 통신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잠들지 않는 지상의 조정실
통제센터에는 운항관리사 78명, 탑재관리사 43명 등 13개 부문의 직원 158명이 하루 3교대로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근무한다. 이들은 각자 맡은 지역에 따라 지속적으로 비행기와 통제센터 간에 교신을 담당하면서 항공기가 비행계획대로 고도와 항로 등을 지키는지 살펴본다. 항로상에 난기류나 뇌우, 화산재 등 예기치 못한 기상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알려 고도를 조정하거나 우회로를 택하도록 한다.
실제로 지난 6월 남미 칠레의 푸예우에 화산 폭발로 시드니로 향하던 대한항공 121편이 결항될 위기에 처했다. 화산폭발 뒤 무려 10일이 지났지만 화산재가 항로에 떠다녀 안전 운항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통제센터는 비행고도를 적정 고도인 3만7000피트에서 2만1000피트로 낮추고 화산재를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도록 해당 지역 일출시간에 맞춰 1시간 30분가량 지연비행을 하도록 했다. 착륙은 무사히 이뤄졌고 비행은 별 탈 없이 마쳤다.
고경진 통제센터장은 “기장과 운항관리사가 서로 역할을 잘 분담해 어려움을 극복한 경우”라고 소개했다.
대한항공이 통제센터를 만들게 된 건 1997년과 그 다음해 각각 괌과 런던에서 대한항공 여객기와 화물기가 추락한 것이 계기였다.
대형 악재에 대한항공은 근본적인 안전 진단에 나섰다. 마침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델타항공이 지상에 별도의 비행통제센터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한항공은 델타항공을 본 떠 2000년 8월 통제센터를 만들었다. 이후 11년간 무사고를 기록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지난 9월 현재 여객기 113대, 화물기 23대 모두 136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 항공기들로 하루에 440편 운행한다. 쉴 새 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의 원활한 안전 운항을 위해서 통제센터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통제센터 설립에 시큰둥했던 유럽의 대형 항공사인 루프트한자나 에어프랑스도 잇따라 대한항공을 벤치마킹해 통제센터 설립에 나섰다. 심지어 최근에는 중국 항공사도 대한항공을 방문해 노하우를 배워갔다고 한다.
백업은 필수
통제센터를 설립했다고 해서 안전운항이 100%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통제센터가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백업 설비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지난해 9월 대한항공은 하마터면 운항시스템이 마비될 뻔했다. 추석을 앞두고 서울 공항동 지역에 집중 호우가 내리면서 본부 건물 일부가 침수돼 발전시설을 못쓰게 됐기 때문이다. 전기 공급이 중단돼 비행기와의 통신 등 모든 것이 마비될 위기에 놓였지만 임시 발전기를 사용해 1시간가량을 버텼다. 그 사이 서울 등촌동 인력개발원에 마련해 둔 백업 통제센터로 운항관리사 등이 급하게 이동해 비행기를 정상 운행했다.
2007년 8월 만들어진 뒤 평소에는 운영비만 잡아먹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백업 통제센터는 처음으로 제 역할을 해냈다. 고 센터장은 “오후 4시쯤에 통제센터 인력을 등촌동 임시 통제센터로 옮겨 그날 밤을 꼬박 거기서 지냈다”라며 “만일 백업센터를 마련해 놓지 않았더라면 비행계획 및 감시, 비행기와의 통신 등이 올스톱될 뻔했다”고 회고했다.
지난달 14일 인천공항 항공교통센터(ATC)시스템이 마비돼 1시간가량 항공기 이륙이 지연된 것도 백업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있지 않은 탓이었다. 대한항공 종합통제본부 박찬혁 운영계획팀 팀장은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경우 통제센터 인원만도 800명에 달한다”면서 “비행기 안전운항을 위해 통제센터의 역할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