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물드는 서라벌, 요동치는 ‘천년의 숨결’… 경주서 가을밤 즐기기

입력 2011-10-05 17:26


신라의 고도 경주는 밤이 더 황홀하다. 문무대왕이 잠든 동해바다에서 솟은 태양이 토함산을 넘어 김유신 장군 묘소와 이웃한 선도산을 넘으면 첨성대를 비롯한 경주의 유적들이 은은한 경관조명의 빛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경주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감격스런 순간이다.

경주의 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이웃인 노서동과 노동동에서 시작된다. 대릉원 후문과 맞닿은 노서동과 노동동은 봉황대를 비롯해 신라의 유명한 고분들이 나지막한 집들에 둘러싸여 천년의 휴식을 취하는 곳. 나그네의 눈에도 거대한 고분이 위압적이지 않고 친숙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같은 하늘 아래서 오랜 세월을 함께 호흡한 때문이리라.

노동동 고분군에서 가장 큰 무덤은 동산만한 봉분에 고목 몇 그루가 뿌리를 내린 기이한 모습의 봉황대. 봉토 지름 82m, 높이 22m로 조선시대에 성덕대왕신종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타종을 했던 곳으로 해질녘 고목의 긴 그림자가 봉황대를 수놓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고고학자인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가 발굴해 스웨덴의 ‘서(瑞)’자를 따고 무덤에서 나온 금관장식의 봉황에서 ‘봉(鳳)’자를 따서 이름 붙인 서봉총, 금방울이 나온 금령총,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호우가 출토된 호우총 등 노서동과 노동동 고분은 해질녘 인근의 커피숍에서 커피향에 취해 볼 때 가장 낭만적이다.

커피숍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고분들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면 벚나무 단풍잎이 거리를 뒹구는 대릉원 담장길을 산책할 차례.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연상하게 하는 매력 탓에 대릉원 담장길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이름 높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벗어나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야간조명으로 한껏 멋을 낸 월성과 첨성대, 그리고 동부사적지구의 고분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렌지색 조명으로 물드는 첨성대는 한 송이 야화처럼 황홀하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원통형으로 축조된 첨성대는 질감이 돋보이는 석조물. 동그라미 두 개를 타고 온 연인들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첨성대의 네모난 문을 통해 천년의 비밀을 엿보는 모습도 이곳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어머니의 가슴을 닮아 푸근하게 생긴 동부사적지구의 고분군은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더욱 빛난다. 야간조명을 받아 반달이나 금가락지처럼 보이는 고분은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 불빛에 젖어 기이하게 보이는 계림과 월성 사이의 산책로를 걸어 도로를 건너면 최근 ‘동궁과 월지’로 이름이 바뀐 안압지가 나온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674년 궁 안에 큰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세 개의 산을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고 갖가지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고 한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궁전’이란 뜻의 임해전에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안압지는 신라 멸망 이후 본래 모습을 잃은 연못에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들자 붙인 것으로 본래 이름은 월지(月池).

월지는 동서 200m, 남북 180m, 둘레 1000m로 크지는 않지만 가장자리에 굴곡이 많아 어느 곳에서 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신라인들의 세련된 창의성이 돋보인다. 특히 복원된 3채의 건물이 불을 밝히고 연못에 반영을 드리운 모습은 데칼코마니 기법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1975년 월지에서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물은 부장품인 신라 고분의 출토품과 달리 왕실에서 사용하던 실생활용품이 대부분으로, 이 중에는 정사각형 6개와 육각형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인 주령구(酒令具)가 눈길을 끌었다.

안타깝게도 진품은 유물 보전 처리과정에서 불타 없어지고 복제품만 남았지만 주령구의 면에는 노래 없이 춤추기(禁聲作舞), 술 석 잔을 한번에 마시기(三盞一去),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曲臂則盡), 시 한수 읊기(空詠詩過),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自唱自飮) 등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의 풍류를 짐작하게 한다.

낭산의 선덕여왕릉에서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진평왕릉으로 이어지는 농로는 휘영청 달 밝은 날이면 꼭 걸어보아야 할 코스. 비록 가로등은 없지만 달빛과 별빛을 머금어 더욱 하얀 시멘트 농로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걷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어둠 속에 침잠한 진평왕릉과 이를 둘러싼 노송의 가지 끝에 달린 둥근달이 자아내는 호젓함의 극치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을 감탄하게 했다.

경주의 밤은 보문호수에서 절정을 이룬다. 거울처럼 잔잔한 호수는 오색물감을 풀어놓은 듯 황홀하고 호숫가 산책로는 잠 못 이루는 연인들의 밀어로 은근하다. 터널을 이룬 벚나무 가지에서는 빨갛게 물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져 산책로를 뒹굴다 연인들의 발끝에서 바스라진다.

밤이 시나브로 깊어갈 무렵 경주의 랜드마크인 경주타워에서는 화려한 빛의 잔치가 펼쳐진다. 아파트 30층 높이의 경주타워(82m)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음각화한 건물로 ‘2011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폐막하는 이달 10일까지 화려한 멀티미디어쇼가 이 타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신라의 태동과 흥망성쇠를 레이저와 3D 프로젝션 맵핑 영상으로 형상화한 멀티미디어쇼가 끝나면 경주의 밤하늘은 다시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천년 전 신라의 달밤처럼….

경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