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조용래] 厄物 된 21세기형 실험, 유로존
입력 2011-10-05 17:35
처음엔 2000만원만 빌려주면 더는 손 안 벌리고 어떻게든 혼자서 꾸려나갈 수 있겠다고 했다. 이웃인 데다 같은 살붙이라서 넉넉지는 않지만 모른 체할 수가 없어 그러마고 했더니 자꾸만 말이 바뀐다. 처음엔 흥청망청한 씀씀이부터 다잡겠노라고 굳게 약조했지만 이제 와선 딴 소리다.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맸다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주겠다던 돈이나 마저 달란다. 안 그러면 그간 빌렸던 돈도 돌려줄 수 없을 거라며 되레 협박이다.
요즘 그리스의 행보가 딱 그렇다. 지난해 5월 이후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재정위기에 직면한 그리스에 구제금융 2000억 유로(약 304조원)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그리스는 조건으로 제시한 긴축·구조조정에 대해 올 들어 세 번째 수정안을 내놓았다. 긴축요구가 너무 가혹하단다. 이에 유로존(유로 사용 17개국)을 비롯해 EU가 발끈했다. 특히 유로존 최대의 경제대국인 독일의 여론이 싸늘하다.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를 생각나게 한다. 여름내 베짱이는 개미가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때 나무그늘 아래서 노래만 부르고 있더니 정작 찬바람 불고 오갈 곳 없게 되자 개미를 찾아가 호소한다. ‘나를 좀 먹이고 재워줄 수 없겠니?’ 하지만 개미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결국 베짱이는….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 게 아니라 남 일할 때 쉬고, 남 쉴 때 또 같이 쉬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한 우화이긴 하나 ‘개미와 베짱이’는 비극적인 결말이다. 숲 속 공동체에서 주변에 동료가 뻔히 있었음에도 한 구성원은 배곯아 죽음을 맞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개미와 베짱이’의 다른 버전도 있다. 베짱이의 노래는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힘들게 일하는 개미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접근이다. 노동의 범주가 생산과 유통만이 아니라 이른바 엔터테인먼트도 엄연히 그 반열에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버전은 해피엔딩이다. 베짱이에게 공연 대가를 기꺼이 지불한 개미 덕분에 개미와 베짱이는 추운 겨울에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얘기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 할 말이 있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윤택한 독일 프랑스 등 북유럽 국가들의 넘치는 자본이 그간 그리스를 포함한 남유럽 곳곳의 휴양지를 독식하면서 부동산 버블을 조장했고 그 결과 현지에서는 분에 넘치는 지출이 자연스럽게 고착됐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정부실을 방치한 그리스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후 그리스를 유로존의 일원으로서 계속 지원할 것이냐, 아니면 이 정도에서 모른 체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 선택이 쉽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유로존의 탄생, 그리고 그 모태인 EU의 출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빼놓을 수 없다. 유럽은 오랫동안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인류 역사를 리드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벌어진 두 번의 대전은 유럽·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씻을 수 없는 야만의 증좌였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은 유럽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1994년 출범한 EU였다(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67년 유럽공동체·EC의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1993년 발효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입각해 유럽중앙은행(ECB)이 만들어지고 공동통화 유로가 탄생(1999)하면서 유럽은 명실 공히 하나의 공동체로 우뚝 섰음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리스를 유로존 밖으로 내버린다면 2차 대전 이후 추구했던 유럽의 새로운 공동체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추구했던 역사는 역(逆)코스로 전락할 수 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늦어도 다음 달 안으로는 가부간 최종 결정을 해야 한다. 유럽의 21세기형 공동체 실험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역코스가 시작될 것인가.
베짱이 그리스를 어찌 해야 할 것인지, EU가 역사의 시험대에 올랐다. 문제는 그 어떤 선택으로 귀결되든지 글로벌 경제의 소용돌이는 쉽게 잠잠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조용래 카피리더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