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입력 2011-10-05 18:00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는 한글”
아홉 살 소녀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순신, 세종대왕, 콩쥐팥쥐…. 동화책을 펼치면 사진이 찍히듯 기억 속에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었다. 매일 밤 할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며 옛날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우리 배용이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하는 구나”라며 칭찬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 국사시간이었다. 역사이야기를 잘 외우고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하는 그에게 선생님은 “넌 꼭 역사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다. 할머니와 선생님의 칭찬은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사학자가 되는 원동력이 됐다.
역사는 그에게 겸손과 소통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몸에 밴 리더십을 인정받아 대학총장까지 됐다. 그리고 50여년 전 아이들 앞에서 역사이야기를 했던 그가 이젠 세계인들에게 한국문화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나라의 품격을 높이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된 것이 아닐까.
‘문화전도사’로 불리며 평생 역사학자와 교육자로 살아온 이배용(64·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의 이야기다. 그에게 ‘국가브랜드 만들기’는 처음부터 낯선 일이 아니었다. 역사와 세계화는 연결선상에 있고, 이화여대에서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일 역시 여성의 브랜드를 키우는 일이었다. 이젠 대학이 아닌 ‘대한민국 명품브랜드 만들기’에 그의 관심이 쏠려 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브랜드라고 생각하는 그를 지난 1일 서울 명동 집무실에서 만났다. 국가브랜드위원장으로 취임한 지 1년 만이다.
지갑이 아닌 마음을 열게 하라
“문화란 서로를 마주보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지요. 배려하고 나눌 때 사람들은 감동받고 지갑이 아닌 마음을 열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나눔과 봉사를 통해 가장 많은 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그는 대한민국이 승부를 걸 수 있는 것이 ‘문화’라고 생각했다. 국제적 신뢰를 얻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문화와 봉사’로, 진정성을 갖고 국제사회에 기여하면 대한민국의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보았다. ‘사람의 지갑보다는 마음을 열게 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국가브랜드란 무엇인가요.
“국가브랜드란 국가의 품격, 즉 국격입니다. 국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문화의 품격 위에 만들어집니다. 국가의 경쟁력과 직결되기에 국가의 호감도를 높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를 알려 국제사회의 신뢰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몰라서 알리지 못한 것을 알리는 일이 저에겐 무척 즐겁고 보람 된 일입니다.”
-대한민국이 빠른 경제성장에 비해 국가브랜드 등수가 높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요.
“문화와 관광, 국민성이 저평가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처 못 갖춘 것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에 대해 몰라서 내놓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경북 경주에 옥산서원, 경상도에서는 전남 장성에 필암서원과 같은 훌륭한 서원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문화를 알아야 자긍심이 생깁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도 입증됐듯이 대한민국의 영혼 속에는 세계 화합의 장을 이끌 DNA가 있습니다.”
-국가브랜드를 어떻게 높일 수 있나요.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 고난과 시련을 극복한 의지와 열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의력의 밑거름입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 속에 있는 ‘정(情)’을 높이 평가합니다. 타인을 향한 정이란 협동심을 불러일으키지요. 이런 문화가치가 대한민국을 명품브랜드로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명품의 중요성은 진정성을 가진 마음입니다.”
“현재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이 거의 모두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평화, 자연, 녹색, 나눔, 생명, 배려, 소통 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 지금 시대에 맞게 스토리텔링할 수 있다면 세계인의 가슴속에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확실하게 각인될 것입니다.”
-세계적 경쟁력을 확인한 ‘한류’ 바람은 어떻게 보시나요.
“우리 문화의 세계적 경쟁력을 확인하는 기회였지요. 좀 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한류 드라마와 K-POP의 뿌리엔 전통문화의 DNA가 있습니다. 분명 창의성과 협동심이 녹아 있습니다. 아이돌그룹 내에서의 역할 분담은 농업사회의 협업정신을 이어받은 거지요. 우리 안에 있는 가치를 발현시켜야 합니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그는 역사는 지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역사엔 우리 민족의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던 것이지요. 혼이 있는 민족이라야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고 희망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입니다. 내년 대선주자들도 역사시험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역사가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율곡에 의하면 미연에 위란(危亂)을 대비하는 자를 상지(上智)라 하고 위란을 알고서 치안을 도모하는 자를 중지(中智), 위란을 보고서도 치안을 도모하지 않는 자를 하지(下智)라고 합니다. 율곡은 선조가 상지는 못되더라도 적어도 중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역사는 정보를 주는 스승입니다. 역사 속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됩니다. 인간은 내일을 모르는 존재지만 오늘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지만 미래에 일어날 문제를 대비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화전도사로 불리는 이유는
조곤조곤한 그의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에 새롭게 눈을 떴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문화역사현장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처음엔 덤덤해하던 이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하버드대학생들의 경복궁 답사를 인도할 때, 학생들은 명성황후 시해 터에서 울먹이며 경청했다. 케임브리지대 총장을 비롯한 세계의 대학총장들,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외국정상 부인과 대사부인들의 창덕궁·경복궁 답사에도 동행해 찬란한 조선왕조 500년 역사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국의 영혼이 깃든 역사의 현장에 빨리 가서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져요. 제가 먼저 감동을 받으니 남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신나게 설명하고 깊이 있는 상호소통을 하면 애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우리문화역사 이야기를 할 때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제가 건강하고 씩씩한 비결입니다.”
그는 1998년부터 대학교수들을 위한 ‘종묘특강’을 시작했다. 당시 교수들은 영화관 단성사는 알아도 그 뒤에 있는 종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러나 종묘 특강에 참여했던 교수들은 스스로 ‘교수역사반’을 만들었다. 그는 총장이 되기 전까지 시간을 내 역사 문화 현장 곳곳을 인도했다.
또 사립대학총장협의회와 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을 맡았을 때도 ‘총장아카데미’를 만들어 역사현장 답사를 인도했다. 격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모임엔 40∼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대학총장들이 참여해 소통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는 매우 많지만 한글을 꼽고 싶습니다. 세종대왕은 문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배려와 화합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한글창제는 지식의 나눔이었죠. 문맹이었던 백성들에게 광명을 찾아 주었습니다. 우리민족의 영원한 스승으로 인정받는 세종대왕의 탄생일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의 성과는 무엇인가요.
“이제 국민들이 브랜드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봉사와 문화의 키워드로 다가갔습니다. 이미 스포츠, 기업, 예술인들의 개인 브랜드가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G20 국가정상회의는 의장국으로서 대한민국 문화 콘텐츠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지난 8월에 열린 ‘국가브랜드컨벤션’은 한류의 원천을 우리 역사와 전통에서 찾아본 의미 있는 행사였습니다.”
신앙은 길이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를 접할 기회는 없었다. 기독교와의 첫 만남은 따뜻하고 정겨웠다. 이화여중 입학 후 첫 채플시간이었다. 노천강당의 푸른 하늘 위로 울려 퍼지던 ‘참 아름다워라’는 평생의 노랫가락이 되었다. 훈시하러 나오신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을 따뜻하게 챙기셨다. “여성들은 찬 바닥에 앉으면 안 됩니다. 방석을 가지고 와서 앉으세요.” 난생 처음 배우는 성경시간에 선생님은 성경구절과 이야기를 줄줄 외우는 그를 칭찬하셨다.
“신앙은 하늘처럼 푸르고, 방석처럼 따뜻하고, 칭찬하는 세상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그 시간이 행복했어요. 이슬비처럼 젖어드는 신앙생활이라고 할까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늘 항상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인생의 무엇인가요.
“이슬비처럼 젖어든 신앙은 내 삶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내가 찾은 길과 주님이 생각하는 길이 다를 때 성경을 읽으며 간구하면 길이 보입니다.”
현재 서울 소망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그는 신앙은 인생의 길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았지만 스스로 하겠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에 순응하며 살았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애국가 4절까지 막힘없이 부르는 그의 나라사랑이야기는 계속될 듯하다.
■ 이배용 위원장
△1947년 서울생
△1985년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2006∼2010년 이화여대 총장
△2008∼2009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
△2009∼2010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2009∼현재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국립중앙박물관 운영자문위원회 위원장,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 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위원
△2010년 9월∼현재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글 이지현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