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목회 현장-서울 주님의교회] 조남수 담임목사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내가 살면 교회가 죽죠”

입력 2011-10-05 17:38


조남수(사진) 목사는 195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7세 때 큰 물난리가 나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머니를 잃었다. 3년 후엔 아버지마저 병환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아가 됐다.

갈 곳이 없어 작은아버지댁에 얹혀살았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운명이었을까. 그 댁 안방 화장대엔 성경책과 복음을 실은 전도지가 있었다. 그는 10세 때 봤던 성경 구절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더 이상 그 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일단 서울로 올라가는 게 상책이었다. 작은 집에서 접한 복음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은 계속했다. 중학교 2년생 시절. 어느 날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이 여호와의증인이었다.

한동안 예수를 믿지 않다가 다시 교회에 나간 때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조규철(서울 명성교회 안수집사)씨의 전도로 성수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조 목사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은 이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자영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머리 한쪽엔 늘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대 후반에 서울장신대에 입학했다. 이어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85년 전도사로 충북 청주로 내려가 영광교회를 세웠다. 3년 뒤엔 열망교회를 창립했다.

‘박수칠 때 떠나야지.’ 조 목사의 신조였다. 잘 나가던 교회를 남겨놓고 그는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서울로 올라와 신대방동의 조그마한 상가건물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바로 주님의교회다.

조 목사는 요즘도 2주에 한 번씩 헌혈을 한다. 최근엔 30번을 기록해 은장을 받았다. “건강해서 남 주는 일이라 매우 기쁜 마음으로 헌혈합니다. 사후 장기기증과 시신기증도 했어요. 내가 죽으면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 갈 겁니다.”

“아사교생(我死敎生·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아생교사(我生敎死·내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요 12:24) 조 목사는 목양실 회의용 큰 탁자 유리 아래에 적힌 문구를 소개했다. ‘한 알의 밀알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교회의 최고 어른은 장로와 집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아니지요.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이 최고 어른입니다.”

윤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