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겉과 속-(8) 미국·캐나다의 투명한 정치자금제도] 인터넷 공개 ‘유리알 검증’

입력 2011-10-05 18:03


미국과 캐나다는 정치자금이 세계에서 가장 투명하게 쓰이는 나라로 꼽힌다. 누가 얼마나 후원했는지, 정치인이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등 모든 내역이 인터넷으로 공개돼 검증받기 때문이다. 정치 선진국인 두 나라는 정치자금을 모금부터 쓰임새까지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내역 공개를 제한하고 무절제한 지출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투명성으로 금권정치 차단=“정치인들이 정치자금 내역을 신고하면 48시간 이내에 인터넷에 공개하도록 법에서 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실시간으로 공개합니다.”

미국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 신시아 바우어리 위원장은 워싱턴DC의 FEC 사무실을 방문한 기자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FEC 홈페이지(fec.gov)에는 내년에 동시 실시되는 대통령과 의원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돈을 얼마나 모아 어디에 쓰고 있는지 모든 내역이 올라와 있다. 누가 개인 후원금을 많이 모았는지, 어느 지역에서 어느 당 후보를 많이 후원했는지, 심지어 후원자 개인의 이름을 검색해 누구에게 얼마나 후원했는지도 알아볼 수 있다.

바우어리 위원장은 “만약 수상한 내역이 있으면 누구든지 신고할 수 있고, FEC의 심사 과정에도 방청객이나 고발자로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FEC는 매주 심사를 한다. 2주에 한 번씩은 공개 심사를 한다.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는 수백명이 방청객으로 참여하고 직접 증언도 한다고 바어우리 위원장은 설명했다. 심사 과정은 물론 심사 결과도 공개하지 않는 한국의 선거관리위원회와는 180도 다르다.

FEC가 공개한 자료는 미국 정치의 투명성을 지키는 보루다. FEC 자료를 들여다보고 정치를 감시하는 시민단체들도 있다. ‘워싱턴DC의 도덕과 책임을 바라는 시민의 모임(CREW)’이란 단체는 지난달 22일 부패 정치인 명단을 발표했다. CREW는 FEC 자료를 근거로 민주당 그레고리 믹스 의원이 17만 달러의 후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일부 후원자에게 무이자 대출을 받은 사실을 폭로했다.

또 ‘돈의 흐름을 알면 정치가 보인다’는 표어를 내걸고 정치자금만 추적하는 ‘책임정치센터(CRP)’, 비영리 선거감시단체인 ‘선거 행동 펀드(PCAF)’, 선거비용 분석 전문단체인 ‘선거자금연구소(CFI)’도 FEC가 공개한 자료와 기업 회계보고서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등 정치자금의 정당성을 면밀히 따져본다.

지출에 대한 규제도 강력하다. 후원금은 선거비용(campaign finance)으로만 쓰도록 하고 있다. 현역 의원의 의정 활동이나 정책 개발에 드는 비용은 모두 의회에서 부담한다. 거꾸로 의회에서 지원하는 돈이 선거에 쓰이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하는 것도 미국 정치자금 규제의 원칙이다.

의회에서 월급을 주는 보좌관들은 선거 운동에 동원할 수 없다. 보좌관들이 자발적으로 선거 운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근무시간이나 의회건물 안에서는 선거 활동이 금지돼 있다. 식사비도 엄격히 통제된다. FEC는 “정치자금 지출은 작은 예외라도 허용하면 개인 비용으로 유용되기 쉽다”며 “특히 식사비·교통비·여행비는 자세한 규정을 두고 규제한다”고 강조했다<표 참조>.

◇선거비용 강력 규제하는 캐나다=캐나다의 연방선거관리위원회(EC)는 미국 FEC처럼 모든 정치자금 내역을 인터넷에 공개한다. EC의 존 엔라이트 공보관은 “전산화가 이뤄진 2000년 이후의 선거자금 내역이 모두 공개돼 있고, 그 이전 자료도 계속 인터넷에 올리기 위해 전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의 선거자금 데이터베이스에는 매일 오후 5시면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된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정치자금 규제는 미국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상 무제한으로 선거비용을 쓸 수 있는 미국과 달리 캐나다에선 유권자 1명당 2달러(약 2500원)까지만 허용된다. 신문과 TV 광고비용도 지역 선관위에서 직접 규제한다. TV광고는 후보자 1인당 360분까지만 가능하고, 신문 광고 횟수와 광고비까지 선관위에서 지정한다.

현역 의원들의 정치자금 지출 규제도 강력하다. 자동차 관리비와 밥값, 여행비용은 물론이고 종이 한 장 쓴 돈까지 따진다. 온타리오주의 도나 캔스필드 자유당 의원은 “의원 1인당 연간 밥값 지출 비용이 600달러이고 주유비와 여행비용도 한도가 정해져 있다”며 “한도가 넘는 금액은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의원들이 의회 사무실의 프린터로 선거 관련 자료를 인쇄한 사실이 적발되면 바로 의회 윤리위원회에 회부되고, 사안이 심각할 경우 의원직을 상실할 수도 있다.

◇정치자금 개혁은 현재진행형=미국과 캐나다가 처음부터 투명한 정치자금 제도를 확립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의 정치적 영향력이 너무 커져 그 반발로 강력한 규제가 도입됐다.

19세기까지 미국 정치는 철도왕 제이 굴드, 선박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등의 재벌에 좌우됐다. 이들은 선거 때마다 막대한 후원금을 쏟아 부었고, 정치인들은 이들을 규제하는 데 주저했다.

1905년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업의 정치목적 후원을 금지하면서부터 일련의 규제가 도입됐다. 71년 연방선거 정치자금법이 제정됐고, 이를 실행할 독립기구로 FEC가 창설된 것은 74년이었다.

미국 정치자금 제도의 가장 큰 고민은 기업이나 노조 같은 영향력이 큰 이익단체의 입김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익단체는 정치인을 직접 후원할 수 없고 정치행동위원회(PAC)를 통해야만 한다. PAC는 연간 5000달러 한도에서 여러 정파의 정치인을 후원한다. PAC는 정책 찬반 광고만 할 수 있고 정치인을 직접 지지할 순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대법원은 PAC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찬반 광고를 무제한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정치자금법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는 이른바 ‘소프트 머니’의 입을 풀어놓은 것이다. 유명 토크쇼 사회자인 스티브 콜버트가 PAC를 결성하는 등 자금력을 갖춘 ‘슈퍼PAC’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슈퍼PAC의 모금액은 이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모금액을 훌쩍 넘어섰다. 슈퍼PAC는 내년 선거에 대기업과 이익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거광고를 쏟아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정치자금을 제한한 갖가지 규제가 슈퍼PAC를 앞세운 이익집단 앞에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영연방의 내각책임제 국가인 캐나다에서는 비교적 늦게 규제가 도입됐다. 74년 선거비용법이 제정된 뒤 77년 현재와 같은 형태의 EC가 설치됐다. 2000년 전자정보공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전자투표 제도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이 본격화됐다. EC에 선거 관련 재판을 관할할 사법권도 주어졌다. 캐나다에서 이익집단의 정치인 후원을 금지하고 선거비용의 제한을 둔 것은 2004년이었다.

미국 FEC와 캐나다 EC는 모두 한국의 선관위와 같이 선거관리와 정치자금 감독을 담당한다. 헌법기관인 한국의 선관위보다 법적 지위는 낮지만, 돈 문제에 관한한 사소한 것에도 엄격한 두 나라의 정치 풍토 때문에 실질적인 위상은 결코 낮지 않다.

워싱턴DC·오타와=탐사기획팀 indepth@kmib.co.kr

정승훈 차장 shjung@kmib.co.kr 김지방 차장 fattykim@kmib.co.kr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