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룸메이트 잔혹살해 혐의 美 여대생 어맨다 녹스, 4년 만에 항소심 ‘무죄’
입력 2011-10-04 18:14
그룹섹스를 거부한 룸메이트를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미국인 여대생이 사건 발생 4년 만에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살인과 섹스, 증거를 둘러싼 공방과 피고인의 빼어난 외모로 언론의 집중관심을 받은 이 사건은 영국인 피해자와 미국인 가해자라는 대립구도까지 더해지며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무죄 선고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검찰, 물증 확보 못해=2007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영국인 룸메이트 메레디스 커처를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던 어맨다 녹스(24)가 3일(현지시간)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날 페루자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검찰이 결정적 증거로 제시한 DNA를 문제 삼았다. 앞서 검찰은 살인에 사용된 흉기 손잡이에서 녹스의 DNA가 발견됐다고 주장했지만 감식 전문가들은 DNA가 채취 과정에서 손상돼 검찰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이후 검찰은 새 DNA 검사를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기각했다. 검찰은 또 녹스가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며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를 저지른 악녀라고 몰아세웠지만 배심원단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커처의 가족들은 “이번 재판에서 메레디스는 잊혀졌다. 우리는 진실과 정의를 찾고 싶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반면 녹스의 가족들은 “어맨다의 악몽이 끝나게 돼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녹스의 변호사는 “녹스는 가족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뒤 4일 모든 행정처리를 마무리하고 시애틀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1994년 전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풀려난 미식축구 스타 OJ 심슨 사건, 두 살짜리 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 7월 풀려난 ‘파티맘’ 케이시 앤서니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정황증거는 있지만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점이 같기 때문이다.
◇상반된 반응, 갈등 커지나=미국인 가해자와 영국인 피해자라는 구도 때문에 선고 이후 상반된 반응이 나오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이제 여우에겐 할리우드 백만장자가 되는 꿈과 불의에 짓밟힌 순교자로서의 새 삶이 기다린다”고 꼬집었다. 신문은 또 커처의 가족들을 집중 인터뷰하며 “녹스가 사랑스러운 딸 커처를 상대로 서커스를 벌였다”고 비판했다.
반면 미국인들은 “녹스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라며 항소심의 결정을 환영했다. 녹스 지지자들은 생중계로 재판을 지켜보며 무죄 판결이 나오자 “우리가 해냈다”고 환호했다. 이날 법정 밖에서는 녹스 지지자들과 반대하는 시민들이 각각 ‘승리’와 ‘수치’를 연호했다.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 악녀와 청순한 이미지가 공존하는 녹스의 모습은 재판 내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미 미국에선 TV시리즈와 영화 제작이 결정됐다. 녹스는 자유의 몸이 됐지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묻혀버렸다고 미국 CNN방송은 지적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