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헌책왕’ 리처드 부스
입력 2011-10-04 17:36
1990년대 후반 경기도 파주에 ‘헤이리 예술촌’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름이 좀 생소하다고 생각했다. “전통마을이라면 ‘헤이’를 표기할 한자가 없을 텐데, 외국에서 수입한 이름인가?” 알고 보니 파주 지역 농요의 후렴구에서 따왔다. 그러면서 영국의 헌책마을 헤이온와이(Hay-on-Wye)도 참고했다고 한다.
헤이리 마을의 산파격인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책 ‘헤이리-꿈꾸는 풍경’에는 1984년 영국 웨일스의 시골마을 헤이온와이를 처음 찾던 감회가 적혀있다. 푸른 들판에 양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 풍경, 와이 강변에 자리잡은 헤이 마을, 여기서 헌책을 파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경이롭게 다가왔다고-.
마을의 주인공은 리처드 부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24세 청년이 안락한 회계사의 길을 마다하고 1962년 고향에 책의 왕국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좋은 책이 있으면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비어 있던 소방서 건물에 고서점을 차린 그는 지구촌을 돌며 좋은 책을 사들여 헤이온와이를 세계적인 ‘헌책의 성지’로 만들기에 이른다.
현재 인구 1400명의 이 마을에는 40여개 헌책방과 인쇄소 제본소 등이 있고, 런던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걸리는 오지임에도 연간 5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100만권의 책을 사간다. 음악, 사진, 영화 등 한 방면을 다루거나 아예 권투, 아메리칸 인디언 등 특정 주제에 집중하는 전문서점도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남짓 걸리지만 오래 머무는 사람이 많으니 식당과 민박집이 생겼고 마을 전체가 헌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책마을을 만든 뒤에도 부스는 성벽 4㎞를 활용한 야외책장, 고객이 책을 가져가고 책값은 알아서 내는 ‘정직서점(Honesty Bookshop)’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1977년 만우절에는 ‘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스스로 ‘서적왕 리처드’ 왕관을 쓰고, 1998년에는 세계 50여 헌책방 마을을 관장하는 ‘헌책 제국의 황제’에 오르는 해프닝을 벌인다.
그가 파주 북소리 페스티벌 참관 차 한국을 찾았다. 왕관을 쓰고 나타난 73세 노인의 표정은 코믹하지만 멘트는 중후하다. “케네디의 여자들이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책이 1000권이나 나올 필요가 있느냐?” “강이나 숲을 생각한다면 많은 책을 만들기보다 헌책에 관심을 갖는 것이 낫다.” 우리의 파주출판도시도 40년 연륜을 쌓으면 헤이온와이의 명성에 이를 수 있을까.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