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

입력 2011-10-04 18:49


[미션라이프] “감리교 문제는 4년제 전임 감독제를 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지금은 천주교 교황처럼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행정 인사 재정을 모두 장악해서 군림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감독은 순수 명예직에 머물러야 해요.”

김선도(81)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53년 목회여정을 소개하면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태의 해법이 명예직 감독제에 있다고 강조했다. 기감은 지난 2008년 감독회장 선거 파행 이후 숱한 고소·고발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감리교단은 물론 교계에서도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기감 내 대표적 원로급 지도자인 김 목사는 1994년부터 2년간 감독회장을 지냈으며,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1996~2000년)을 지내고 2001년 은퇴 후 장천장학회와 광림복지재단 등을 통해 장학사업과 사회복지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교회 구조 속에서 대형교회의 리더십과 교단 리더십이 접목될 때 교단이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신뢰받는 지도자만이 교단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올 데 갈 데 없는 사람이나 목회하기 힘들어 감독회장을 선택하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됩니다. 질서가 잘못 잡히면 교단은 물론 한국교회가 타격을 받게 돼 있어요.”

그는 대안으로 2년제 명예 감독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감은 2004년 이전까지만 해도 2년제 감독제를 운영한 바 있다. “과거 감독회장이 되기 위해선 연회 감독을 거쳐야 했습니다. 교단에서 검증도 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기감이라는 대형교단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교계에서 ‘3도(김선도·김홍도·김국도)’라는 이름으로 저와 제 동생을 지칭합니다만 알려진 바와 달리 저는 동생들이 감독회장 나오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어요. 동생들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기도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형제라 할지라도 추구하는 리더십과 사상이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김 목사는 저출산·양극화 시대 한국교회가 목회 패러다임을 바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며 결혼식장과 장애인 센터, 저소득층을 위한 돌봄센터 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감 사태의 해법은 무엇입니까.

“감리교는 4년제 전임감독회장제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천주교 교황처럼 카리스마 리더십이 통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감독은 명예직이에요. 행정 인사 재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수백명이 넘는 직원을 통솔할 필요가 있습니까. 장로교는 총무제도를 가지고도 교단을 운영하는 데 굳이 감리교가 감독회장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옛날처럼 2년제 감독회장으로 환원해야 해요.”

-문제의 당사자가 친동생이라서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겠습니다.

“사실 동생이 감독회장으로 나온 것을 찬동하지 않습니다. 이곳을 찾아왔을 때 기도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형제간이라도 사상과 목회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53년 목회경험에서 봤을 때 현재의 한국교회는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신학교를 나와도 갈 데가 없는 신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미국 에즈베리신학교 이사로 18년째 일하고 있는데 이사회에 참석할 때마다 이제는 신학교가 단순히 목회자를 길러내는 게 아니라 전도자로서 교회를 세우는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r)’를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해요. 처치 플랜터들이 부족하다 보니 교회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불미스러운 현상은 예배가 웃기는 예배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점차 사라지고 자기감정을 만족시키는 잘못된 예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옛날엔 부흥회가 열리면 통곡 소리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바다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경건함, 거룩성, 신비성 등 예배의 의식과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지 않나 싶어요. 최근 미국 기독교 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지적처럼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식이나 신앙고백이라기보다 CCM 등 현대 워십을 앞세워 엔터테인먼트 스타일로 변하고 있다는 게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숱한 고난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포위당하고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때 ‘한번만 살려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하고 서원했어요. 전쟁이 터지기 전 신의주의학전문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의무장교로 입대해서 백선엽 대장 밑에서 전투를 치렀던 경험이 있습니다. 전쟁 때문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2년간 생사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군산 피난민 수용소에 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어요. 막상 군산에 도착하니 가족이 어디 있는지 찾을 방법이 없는 겁니다. 무조건 기도를 하면서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판자를 놓고 초콜릿과 껌을 팔고는 아이가 보여요. 가만히 보니 8년 밑 동생 홍도(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더라구요. 그래서 ‘야, 너 홍도 아니냐?’고 했더니 ‘형님!’ 하더니 와락 안겨요. 감사하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이 다 살아서 거기에 생존해 있던 겁니다.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족은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서울 광림교회를 맡기 전 군목으로 활동하셨던 이력이 있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도 궁금합니다.

“생명을 살려주신 하나님 앞에서 사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생명과 바꾼 내 사명인데요. 서원대로 1958년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하고 60년 대전 공군기술교육단에서 군목으로 있으면서 장교 후보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 부임하고 나니 8평쯤 되는 흙벽돌 교회가 있어요. 생활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교회건립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빗자루를 들고 청소부터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은 사례비는 모두 건축헌금과 가난하고 어려운 사병들을 돕고 전도하는 데 내놨죠. 예배당을 짓는 데 먹을 것이 없어 밀가루를 사다가 칼국수를 해먹었어요. 그 냄새가 역할 정도가 될 때는 군대식당 아줌마에게 부탁해 누룽지를 얻어다가 삶아먹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예배당을 짓다보니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시더군요. 한국 최초로 군목자격으로 유학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때 지은 교회는 지금 대전에서 두 번째로 큰 감리교회가 됐습니다.”

-해외 유학이 생소하던 시절 군목신분으로 유학이 가능했단 말입니까.

“1970년 공군사관학교 군목실장을 맡고 있던 때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군목세계에서 장군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군목장군이 돼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당시만 해도 창의적인 군 목회에 푹 빠져 있던 시기입니다. 새벽 3시 보초병을 찾아다니고 군대 내 영창에 갇혀있는 장교와 사병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가 득실거리는 영창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낼 정도였습니다. 이런 열정은 통하게 돼 있습니다. 결국 국방부 장관에게 허락을 받고 1968년 미국 웨슬리신학대학원 종교교육으로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광림교회 청빙은 어떻게 받았습니까.

“미국에서 다녀오니 서울 중구 쌍림동에 있는 광림교회 장로님 몇 분이 와서 나를 청빙하겠다고 수차례 간청을 해요. 그래서 ‘저는 군대를 황금어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민간인 교회는 갈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근데도 워낙 간절하게 매달리니 할 수 없이 짚차를 타고 가 설교를 몇 번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150명이 모이던 시절입니다. 성도 입장에선 군복을 입은 목사가 와서 사명감과 열정을 갖고 강력한 영적 체험이 느껴지는 설교를 하니 꼭 붙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나봅니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광림교회 장로님들이 국방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쓴 겁니다. ‘김선도 목사가 예편하고 민간인 교회를 맡으면 군인교회도 여러 개 짓고 군 복음화에 헌신할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게 이 교회를 맡게 됐습니다.”

-중소형 교회가 어떻게 세계적인 대형 감리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때 교회를 맡고 보니 감리교회 중 가장 큰 교회가 정동감리교회였는데 500명 정도 모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크게 부흥할 때입니다. 세계 제일의 장로교회, 순복음교회가 한국에 있는데 왜 감리교회는 없냐는 말을 성도들에게 했습니다. 수요일마다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전도에 나섰습니다. 나중엔 교회가 꽉 차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1979년 강남으로 교회를 옮기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강남은 논이나 밭이었을 텐데요.

“토요일마다 장로님들을 모아놓고 도시개발 분석을 하며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할 강남으로 가야합니다.’ 장로님들이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지금의 광림교회 자리는 배나무 밭이었습니다. 돈도 없는 상태에서 천막을 하나 치고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근처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현대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입니다. 버스도 없을 때이지만 뜨거운 영성이 있고 예배의 감격이 있다 보니 강북지역 성도들이 배 밭까지 걸어 들어오더군요. 그들이 몰려오면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것을 볼 땐 정말 눈물이 핑 돌았어요. 7개월간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아 성도들과 동네를 돌면서 새벽기도를 드리던 게 생각납니다.”

-설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설교는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죄 사함과 무한한 생명의 복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개인의 심령상처, 사회적 상처 등을 치유하는 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고학력 시대 교인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선 진지한 신앙고백과 함께 시대에 맞는 메시지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호가 장천(杖泉)입니다.

“지팡이 ‘장’에 샘 ‘천’을 씁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마실 물이 없었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샘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세계에서 모아온 지팡이들을 모아 사무실 한편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감신대에 70억원을 들여 기숙사를 지어줬는데 총장님이 제 호를 따라 장천생활관으로 명명했습니다.”



-목사님의 53년 목회활동을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한 새벽기도회는 지금까지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2001년 비록 은퇴했지만 교회와 국가, 세계 선교를 위한 중보기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기도의 어머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철저하셨던 어머니로부터 영적 DNA를 물려받았어요. 장남인 저와 남동생 3명, 여동생 3명을 위해 늘 새벽 기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3남매가 모두 각 분야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녀교육은 자연스럽게 삶을 통해서 신앙을 전수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목사의 자녀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했죠. 장남(김정석 서울 광림교회 목사)이 목회자로 헌신하니 신학을 하려던 차남(김정운 명지대 교수)이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독일 베를린대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43명의 교수 지원자를 물리치고 교수가 됐거든요. 지금 가장 필요한 학문이 뭐냐 했을 때 심리학이거든요. 지금은 문화심리학자로 TV에도 자주 등장하더군요. 문화심리학자로 긍정적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국민들의 정서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더 큰 격려와 치유가 된다고 봐요. 막내딸은 선교를 하는 의사(선한목자병원 이창우 원장)를 만나 의료선교를 감당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병원, 선교하는 병원을 추구하고 있죠.”

-한국교회 내 전임 목사와 후임 목사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후임자들은 전임자의 전통을 계승하기보다 ‘전임자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흔들리죠. 감리교 시작의 기초는 이성이고 전통이며 체험이었습니다. 전통이 흔들리면 위험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단이 생기는 이유는 전통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누가 뭐라 해도 영적 DNA가 계승돼야 합니다.”

-교회 옆 주차장 부지에 사회봉사관을 짓고 있습니다.

“과거 주차장 자리에 지하 6층, 지상 9층의 사회봉사관을 짓고 있습니다. 2012년 완공 예정인데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니 주변사람들이 싫어해요. 1910년 에든버러대회 때 참석자들은 이런 전망을 했습니다. 100년 후인 2010년 이 자리에서 모임이 열릴 땐 전 세계가 기독교로 변화돼 있을 것이라고. 아쉽게도 그런 낙관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의 거센 도전, 가난이라는 3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개인성화는 반드시 사회 성화로 번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사회성화의 매개체가 돼야 합니다. 사회봉사관에는 탁아소와 장애인 시설, 저소득층을 위한 결혼식장, 돌봄센터 등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은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 쪽으로 가야한다고 봐요.”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