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월스트리트

입력 2011-10-03 21:34

뉴욕 월스트리트의 역사는 네덜란드가 서인도회사를 설립한 16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인들은 레너피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맨해튼 지역을 차지한 뒤 ‘뉴암스테르담’으로 명명하며 무역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네덜란드인들은 방어를 위해 나무 담장을 설치했다. 목책 안쪽 안전지대인 월스트리트에서는 무역상과 금융중개업체들이 모여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팔았다. 1664년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뉴암스테르담은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금융 거래는 유지됐다.

1789년 조지 워싱턴의 첫 번째 미 대통령 취임식이 월스트리트의 페더럴홀에서 거행됐다. 3년 뒤 필라델피아증권거래소가 투기행위로 붕괴되자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해밀턴이 월스트리트의 플라타너스 밑에서 중개인들과 버튼우드 협약을 맺음으로써 뉴욕증권거래소가 탄생했다. 1820년대 허드슨강과 이리호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 1865년 남북전쟁의 북군 승리로 월스트리트는 미 경제의 중심 지위를 굳혔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이 세계경제를 주도하면서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0년 9월 모건 은행 길 건너에서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폭탄이 터져 38명이 숨지고 143명이 중상을 입었다. 1929년 대공황 당시에는 세계경제 폭락의 진원이자 상징이 됐고, 2001년 9·11테러 때는 주요 표적이 됐다. 2008년 세계금융 위기 때 월스트리트는 위기의 주범으로 비난받았다. 월스트리트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미 중앙은행이 70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실시하자 도덕적 해이 논란이 거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의 탐욕이 위기의 근원이었음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최근 이곳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시위가 3주째 계속되고 있다. 시위는 보스턴에 이어 캐나다 토론토 등지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매우 복잡다단하다. 경제위기 책임론, 수천명을 해고하면서도 스스로는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챙기는 월스트리트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재정적자를 이유로 일자리 창출 계획에 반대하면서도 부자들의 세금 증액을 거부하는 공화당에 대한 분노 등도 표출되고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미국적 성취의 상징이던 월스트리트의 천문학적 자본이익에 미국인 스스로가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