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기수] ‘殺醫 행정’이 문제다

입력 2011-10-03 22:33


감기 등 52개 경증질환자가 3차 의료기관을 이용할 때는 약값을 더 내야 하는 ‘약국본인부담률차등제’가 1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왜곡된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및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1일은 토요일이고, 2∼3일이 공휴일이므로, 4일부터 시행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벌써 이 제도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동안 정부가 건강보험재정에서 부담해온 약값의 30%를 환자들에게 그대로 전가하는 꼴이 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52개 경증질환자들의 약값은 앞으로 동네병원이 1만원일 경우 종합병원에선 1만3300원, 대학병원 중심의 상급종합병원에서는 1만6670원으로 오르게 된다. 환자들의 본인부담액이 종전보다 1만원 기준으로 무려 3300∼6670원이나 더 많아진 것이다.

당뇨병을 경증질환에 포함시킨 것도 잘못이란 비판도 나오고 있다. 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 박성우 교수(대한당뇨병학회 이사장)는 “당뇨병은 감기와 같이 분류될 수 있는 사소한 질환이 아니다”며 “지난 8월 당뇨 환자 5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9.8%가 당뇨병을 중증질환으로 인식하고 있고, 약값 부담이 커진다 해도 단골 병원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응답자가 70.4%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대형병원으로만 환자들이 몰리는 의료전달체계의 왜곡현상과 이로 인해 ‘중환자’ 소리를 듣게 된 건강보험재정을 보호하겠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이 때문에 본인부담이 더 늘어나는 것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측면이기도 하다. 문제는 절차와 방법이다. 충분한 사전 협의 및 이해관계 조정 없이 밀어붙이기 식 일처리가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아무리 좋은 처방이라도 ‘환자’가 수긍하지 않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을 때에는 먼저 그 환자의 상태를 바꾼 뒤에 써야 하는 법이다. 우리가 옳으니 무조건 따르라고 밀어붙이면 반발을 낳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떠넘겨지기 쉽다.

‘팔의론(八醫論)’이란 게 있다. 조선왕조 세조가 한 얘기다. 그는 의사를 여덟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 심의(心醫)는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의사다. 둘째 식의(食醫)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음식을 약으로 쓰기도 하는 의사다. 셋째 약의(藥醫)는 의서에 따라 약방문을 쓸 줄만 알지 약 쓰는 타이밍을 모르는 의사다.

또 환자 상태가 위급해지면 망연자실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혼의(昏醫), 환자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아무 약이나 마구 쓰며 여기 저기 닥치는 대로 침을 놓는 자는 광의(狂醫)다. 이미 고칠 수 없게 된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함부로 나서는 망의(妄醫)와 의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사 행세를 하는 사의(詐醫)는 의사도 아니다.

마지막 여덟째는 살의(殺醫)로 세상일에 경험이 없어 인도(人道)와 천도(天道)를 알지 못하며 병자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도 없는 자다. 세조는 특히 이 살의에 대해 “남을 이기려는 마음만 가득하여 남이 동쪽이라 하면 서쪽이라 우기고, 먼저 말을 내뱉은 다음에 그를 합리화하는 논거를 찾으며, 자기가 틀린 걸 알고도 억지를 부리며 고치지 않는 자”라고 비판했다.

의료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보건의료 당국자의 자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마음을 열고 심의나 식의와 같은 자세로 병든 의료체계 개선에 임해야 시행착오와 불협화음을 줄일 수 있다. 반면 살의 식 정책 처방으로는 건강보험재정 보호는 물론 국민건강을 되레 피폐하게 만들게 된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