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90) 단풍은 예쁘기만 한가
입력 2011-10-03 17:33
산속에 가을 정취 들차다. 나무들 어지러이 머리 풀고, 비탈 바위 납작 바위 키를 재는 풍경이 스산하다 못해 수선스럽다. 얼키설키한 구도와 나고 드는 소재가 시선을 안착시키지 못하는 그림이다. 찾아보면 눈 둘 곳이 있긴 하다. 가운데 너른 바위에 노인 하나 걸터앉았고, 나무 아래 수레 모는 아이가 숨어 있다.
가득해서 황잡한 이 그림, 그린 이는 문기가 남다른 선비화가 이인상이다. 그는 풍경을 곱게 다듬지 않는다. 꾸며서 아양 떠는 화면은 환쟁이나 하는 짓, 내버려둬서 제멋대로인 산수가 그의 눈에 도리어 자연스럽다. 산과 물, 꽃과 나무가 언제 입 맞추어 솟고 흐르고 피고 자라던가. 버석하게 여윈 가을 기운이 메마른 붓질에서 차갑다.
화가는 당나라 두목의 시구를 적었다. ‘수레 멈추고 단풍 숲 늦도록 쳐다보니/ 서리 맞은 잎이 이월 봄꽃보다 붉구나’. 때는 찬 이슬이 서리로 변하고 온 산에 홍엽이 물드는 단풍철이다. 저 노인은 해지는 줄 모르고 붉은 잎사귀에 넋을 뺏긴다. 나무마다 고까옷 갈아입으니 청단풍과 홍단풍만 단풍이냐, 고로쇠와 복자기도 앞 다퉈 단풍 든다.
산마다 붉은 색칠에 바쁘자 청나라 장초는 시절 헷갈린 시를 쓴다. ‘조물주가 술이 취해 붓을 휘두르니/ 봄 가을의 꽃나무를 바꾸어 그리네’. 단풍이 반가운 시인의 귀여운 투정이다. 하여도 가을은 숙살(肅殺)의 계절이다. 젊은 여자는 봄을 타고 늙은 남자는 가을을 앓는다. 갈바람에 울적한 백거이는 ‘취한 내 모습 서리 맞은 단풍/ 발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하며 한숨지었다. 올 가을 단풍에 어느 가슴이 멍들까.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