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진심의 모습

입력 2011-10-03 21:36


“칼국수집 사람들의 얼굴은 늘 담담하고 평화로웠기에 믿음이 절로 갔다”

내가 사는 동네에 칼국수집이 새로 생겼다. 깔끔한 실내외 인테리어는 주변의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었고 주차공간도 넓었다. 칼국수의 양도 넉넉했고 맛도 좋았다. 주인은 언제나 환한 얼굴로 손님들을 맞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도 주인만큼이나 상냥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왔다. 어떤 날은 모든 손님들에게 음료수를 서비스로 주었다. 날이 갈수록 손님들이 많아졌고 종업원 수도 많아졌다.

몇 달이 지나자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손님들이 넘쳐났다. 대기 번호표를 받고 밖에서 10분이나 20분 정도 기다려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들은 더욱 많아졌다.

어느 날 그 집에 갔을 때, 이전보다 예민해진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상냥했던 종업원들의 얼굴도 피곤에 절어 있었다.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짜증내는 손님도 있었고,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커피 한 잔 편히 마실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는 손님도 있었다. 서비스로 주던 음료수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집을 찾는 손님이 줄었다.

그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칼국수집이 생겼다. 먼저 생긴 칼국수집 못지않은 규모와 인테리어를 갖춘 집이었다. 처음엔 손님이 꽤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큰 폭으로 줄었다. 뒤늦게 ‘개업기념 반값할인’이라는 광고지를 유리창마다 큼지막하게 붙여 놓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집에 직접 가보지 않은 터라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음식 맛이 문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친절한 음식점보다 맛있는 음식점을 사람들은 더 좋아한다.

그곳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칼국수집이 있었다. 적어도 20년의 전통을 가진 집이었지만 간판 어느 곳에도 ‘원조’라든가, ‘20년의 전통’이라는 말은 씌어 있지 않았다. 메뉴도 칼국수 하나뿐이었다. 시설은 허름했지만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였다. 주인이나 종업원의 모습엔 과장된 친절이 없었다. 손님들을 대하는 그들의 얼굴은 늘 담담하고 평화로웠다. 배고픈 사람은 절대로 이 집에 오면 안 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손님들이 있을 만큼 음식도 느리게 나왔지만, 빨리 달라고 불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손님이 많은 날엔 대기 번호표를 나눠주기도 했지만,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낯모르는 손님 두 명을 한 테이블에 앉히는 일도 없었다.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을 땐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음식점 밖 어디에도 커피 마실 공간은 없는데도 말이다. 손님들은 끼니때와 상관없이 많았다. 끼니때를 일부러 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손님이 많은데도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영업을 하지 않았고, 저녁 8시면 영업을 끝냈다.

이 집 주인을 볼 때마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프랑스 제빵사의 말이 생각났다. 빵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제빵사의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칼국수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맛과 서비스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프랑스 제빵사와 비슷한 주인의 철학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형식적인 배려와 친절로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과장되지 않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진심을 전할 수 있다. 이 세상 최고의 반전은 인간의 변덕스러움이고, 변덕스러움은 인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유는 단지 인간이 만들었을 뿐, 호랑이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여우는 여우의 모습으로, 양은 양의 모습으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에 의해 설득되었다면 그것은 말 속에 진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행동에 감동했다면 그것 또한 행동 속에 진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심은 호들갑스럽지도 않고 자신의 행보를 계산하지 않는다. 진심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담담히 자신을 보여준다. 진심은 진심일 뿐 소리 내어 자신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