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개혁 알을 낳은 에라스무스 (下)
입력 2011-10-03 17:54
“개혁 필요하지만 교회분열은 안돼!” 루터에 조언
종교개혁의 알을 낳은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태어난 연도가 1466년이라는 설도 있고, 1469년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출생연도를 두고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맞섰다. 취리히 시민이 되어 달라고 두 번이나 초청할 정도로 에라스무스와 인연이 깊은 스위스는 출생연도를 1466년으로 지정해 1966년에 탄생 500주년을 기념했다. 반면에 그의 조국인 네덜란드는 1469년을 출생연도로 결정하여 1969년에 탄생 500주년을 기렸다. 출생연도가 불분명한 것은 에라스무스가 거의 고아로 자랐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16세 때 스페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와 수도 생활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총명함과 문필적 재능은 그를 한낱 시골 수도원의 수도사로 썩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주교의 비서를 거쳐, 파리 고등교육원에서 신학 과정을 밟았다. 1499년에 처음 방문한 영국은 그에게 지적인 자극과 활기를 주었다. 이때 나이는 어리지만 평생의 절친으로 지내게 되는 토머스 모어와 또 지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준 존 콜릿도 사귀었다.
에라스무스는 1500년 파리에서 ‘격언집’을 처음 출간했다. 그는 1500년부터 1533년까지 30여년 간의 세월 동안 이 ‘격언집’을 끊임없이 개정하고 증보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왜 ‘격언집’에 그토록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가. ‘격언집’은 격언에 담긴 고전의 지혜를 통해 현시대를 통렬하고도 새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격언의 특징으로 널리 쓰여야 하며, 통렬하고 신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격언집’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격언집’은 출판된 후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에 쓴 ‘우신예찬’은 그의 명성을 더 높여 주었다. ‘우신예찬’이 나오면서 주목받은 책은 그가 1503년에 쓴 ‘엔키리디(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이다. ‘우신예찬’의 기본적 생각이 이 책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책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교 전사를 위한 작은 교본’ 또는 규칙이다. 여기에 나오는 22가지의 규칙은 당대 지배적 종교와 세속적 물질주의에 대항해 삶 속에서의 영적인 전투를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이다.
이 ‘엔키리디온’를 쓰고 난 후 에라스무스는 오래 전부터 원했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뛰어난 고전 실력과 인문학적 지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았다. 그중에는 추기경들과 교황 레오 10세도 있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신앙의 본질을 잊은 성직자들의 화려하고 의례적인 삶과 세속적인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까이에서 체험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신예찬’은 그러한 현상에 보내는 유쾌한 풍자와 조롱이었다. 그는 ‘우신예찬’을 쓴 후 오랫동안 작업해 왔던 헬라어 신약 성경을 1516년에 처음으로 펴냈다. 뛰어난 고전실력을 바탕으로 헬라어 필사본을 정밀하게 대조해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찬하고, 라틴어로 비평과 주해를 달아 대중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이 대중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학자와 성직자들은 에라스무스를 오히려 비난했다.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는 그가 편찬한 헬라어 신약성서를 대본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알을 낳고 있었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이면서 종교 개혁의 불씨는 타올랐다. 루터는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에라스무스의 지원을 기대했다. 구교 측에서는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를 반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루터를 옹호했고, 1520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된 루터를 구명하기 위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 때문에 그는 구교로부터 평생 엄청난 의혹과 공세에 시달렸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관 역할을 했던 알레안더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보다 더 우리의 신앙에 해로운 글을 써댄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원했지만, 교회 분열은 원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루터에 대해 분열과 분파적 행동을 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조언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루터도 에라스무스도 어쩔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면, 루터에게 대항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우려한 대로 루터의 격정적 성격은 독일 농민 전쟁에서 수많은 농민이 처형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사람은 어찌 보면 물과 불 같은 사이였다. 에라스무스가 물이라면, 루터는 불이었다. 에라스무스가 차분하고 치밀하다면, 루터는 격정적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에라스무스가 1524년에 ‘자유의지론’을 출간하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기에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구교가 인간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신앙 이외의 행위를 요구해 온 것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의지의 부자유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행위 없는 믿음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선해지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신앙을 비판했다. 불같은 성격의 루터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자유의지론’를 반박하는 ‘의지노예론’를 썼다. 에라스무스는 2년 뒤에 ‘광신’이라는 책을 써서 이를 반박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아무 것도 개선할 수 없다면, 인간에 대한 교육이나 사회적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반박하면서도 에라스무스가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노예의지론’의 결론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당신만이 요점과 핵심을 찔렀습니다. 당신만이 급소를 보았고 나의 목을 조르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충성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말년에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가톨릭 측에 기우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모든 종교의 적”이자 “그리스도의 적대자”라 부르기도 했다. 루터파와 가톨릭 양쪽의 종교 논쟁에 지친 에라스무스는 1529년에 바젤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했다. 그 사이에 짤막한 책인 ‘아동교육론’을 써서 출간했다. ‘아동교육론’에서 그는 유년기의 아동교육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교육을 통해 무지와 편견 그리고 오류 등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인문주의적 교육관을 피력했다. 이것은 루터와의 논쟁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종교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지지했지만 끝내 가톨릭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가톨릭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더 나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 나은 교회를 원했다. 그에 따르면 신앙이란 단지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이다. 그는 1536년 7월 11∼12일 사이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바젤 대성당에 묻혔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비롯해 여러 사람과 논쟁을 벌였지만, 한번도 원칙을 벗어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새겨져 있다.
“Concede nulli”(나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