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철희 (7) 소련선교회 일 도우며 ‘선교의 꿈’도 무럭무럭
입력 2011-10-03 17:38
88올림픽 직후에는 러시아 발레단, 오케스트라, 아이스 쇼 등 소련인의 내한공연이 많았다. 주로 롯데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소련선교회 김영국 장로님, 외대 러시아어과 청년들과 함께 성경책을 전달하기 위해 호텔로 달려가곤 했다. 물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와 호텔 측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투숙객 방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아침 식사를 할 때 식당 앞에서 전도지와 성경책을 나누어주었다. 어떤 이들은 성경책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젊은이는 4권을 줄 수 있느냐고 했다. 러시아에 자기 형제가 4명 있다고 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가 전한 러시아 성경책이 모스크바 시장에서 미화 8달러에 팔린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살 것이니까 그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아내가 서울신대 신대원 목회학석사(M.Div.) 과정을 마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소련 개방 후 일손이 바빠진 소련선교회를 도와야겠다고 했다. 강남에서 신촌까지는 꽤 멀었지만 아내는 1주일에 두세 번씩 선교회 사무실에 나가 자원봉사를 했다. 처음에는 우표 붙이는 일, 청소 등을 했다.
얼마 후 소련선교회가 강남으로 이사한 다음부터는 아예 매일 출근하면서 재정, 회지 발간하는 일을 도맡았다. 1991년 4월 소련선교회는 처음으로 사할린, 하바롭스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도 사할린 동포 방문이 시작됐고, 지하교회 지도자들과 성도가 가끔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우리도 집을 개방해 그들을 맞이하곤 했다.
소련선교회는 소련이 개방되기 훨씬 전인 1982년부터 김영국 장로님과 외대 러시아어과에 다니던 청년들에 의해 시작됐다. 철의 장막의 빗장이 풀리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 선교 단체를 통해 들어오는 소련 지하교회의 소식을 들으며 소련에 복음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했다. 김 장로님은 극동방송에서 러시아어로 복음을 전했다.
개방 직후 김 장로님은 모스크바에서 연해주까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지를 돌아봤다. 난방이 끊긴 하바롭스크에서 추운 밤을 지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많은 성도의 기도로 기적적으로 소생하셨다. 그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일이 더 바빠졌지만 이후 하나님은 선교회를 이끌어갈 좋은 사역자들을 보내주셨다.
훗날 나와 아내가 중앙아시아로 선교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 쌓은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두 마디 배워둔 러시아어를 선교지에서 들었을 때 몹시 반가웠다.
돌아보면 내가 선교사가 된 것은 특별한 부르심 때문이 아니었다. 직장생활과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었다. 선교사도 가지 못했던 철의 장막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여행 가방에 러시아어 성경책을 넣어갈 수 있었던 것도 평범한 비즈니스맨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평신도 선교나 비즈니스 선교, 전문인 선교 등의 말이 나오고 있지만 선교에 대해 전혀 모르고 훈련받은 적이 없던 나에게 선교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선교는 선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