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철희 (6) 구소련 방문길에 성경 전달… 알고보니 KGB 요원
입력 2011-10-02 17:52
유학을 마치고 내가 들어간 한성기업㈜은 수산식품 회사였다. 원양어업을 하는 회사라 해외 출장이 많았다. 1987년쯤 알래스카 근해에서 조업하던 우리 회사의 배 두 척이 미국 정부의 외국어선 축출 정책으로 철수하게 됐다.
당시 그런 큰 배가 갈 수 있는 곳은 구소련 영해밖에 없었다. 소련연방이 아직 개방되기 전이라 조업 허가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절차가 필요했다. 나는 국가안전기획부의 허락을 받아 일본에서 비자를 받아 소련으로 들어갔다.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핀란드 출신 여선교사를 우연히 만났다.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한국서 온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듣고 반가워했다. 전도지 몇 장을 얻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정식 비자를 받고 이 땅에 들어오면서도 전도지 한 장 들고 오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한국에 돌아온 후 소련선교회란 곳을 알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해 러시아권 기자, 선수단에게 전할 많은 성경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러시아어 성경을 구해 다음 소련 출장 때부터 가지고 들어갔다.
당시 소련 입국 반입 금지 품목에는 성경도 포함돼 있었다. 무사히 세관을 통과했지만 성경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는 몰랐다. 돌아갈 날은 다가오는데 난감했다. 호텔에 두고 가면 누구의 짓인지 금방 들통날 것이고 다시 한국으로 가져가기엔 위험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곤 우리가 거래하던 현지 수산회사의 통역관 말리야바니밖에 없었다.
나는 말리야바니를 방으로 불러 부탁을 했다. “소련에는 아직 정교회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소. 내가 성경을 몇 권 가져왔는데 누구에게든 좀 전해 주시겠소?”
내 말을 듣던 그는 안색이 변했고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왜 이런 것을 가져왔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암담했다. 그때처럼 간절히 기도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럴 땐 정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하나님의 지시로 왔습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까” 하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기도도 했다. ‘하나님, 내일 밤에는 아무도 몰래 호텔을 빠져나가 버스 정류장에 두고 오겠습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결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이튿날 말리야바니가 다시 찾아왔다. “당신 어제 그 책 아직 가지고 있소?”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책을 가져갈 것이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책 가져오지 마시오.”
나는 속으로 ‘할렐루야’를 연발했다. 나머지 한 권은 한 고려인 여자에게 전했는데 회사에서 성경을 읽다가 상관에게 들켰다 한다. 그런데 그 상관이 다음에는 자기도 한 권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성경을 전하는데 불편이 없었다.
구소련이 개방되고 10년 후 다시 러시아 출장에 올랐을 때다. 당시 거래하던 수산회사 임원과 저녁식사를 했다. 말리야바니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일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식사하면서 농담 삼아 “예전에 외국인들과 회의할 때는 KGB가 한 사람씩 꼭 참석한다고 들었소. 그런데 그가 누구였소” 하자 임원은 “KGB는 말리야바니였다오” 했다.
기가 막혔다. 내가 소련 비밀경찰에게 성경을 전달했던 것이다. 어떤 선교사도 들어갈 수 없던 때 장사꾼은 가능했던 일이다. 하나님께서 평범한 장사꾼인 나를 선교에 끼워주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